- 2015년 이후 복원된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모습(서울 송파구 잠실동) -
삼전비(三田碑)는 병자호란 때 청(淸) 나라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에(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 있다.
이 삼전비(三田碑)의 비명을 쓴 서화가가 오준(吳竣 = 禮曹判書예조판서·提學제학)이다.
오준(吳竣)은 이조참판을 지낸 오백령(吳百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참의(贈參議) 고경룡(高慶龍)의 딸이다.
그는 당대 절세의 명필이었기로 호장(胡將) 앞에 화의를 표하는 굴욕의 삼전비(三田碑) 문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비문 쓴 것을 두고 마음이 괴로웠다.
이 굴욕에서 그의 양심을 구제하고자 벼슬을 버리고, 산에도 들어가 보고, 붓을 꺾곤 하는 갖은 자책과 자학을 하곤 했다.
그는 손을 들여다보고는, 역사상 가장 더러운 글을 쓴 것에, 마음을 못 가누어 돌로 찍어 피를 내기도 하였다.
한국의 많은 예술가 가운데, 그 자신의 예술 때문에 이토록 아프고 또 극한 상황에서 허덕이던 예술가는 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근대나 현대에는 그의 재능을 악마에게 팔고도 아무런 자책을 느끼지 않은 이들이 허다하고 또 그것이 통속이 되어 있긴 하다.
그만큼만이 그 이전의 한국의 가치체계에서 변질 "현대"의 분량일 것이다.
오준(吳竣)의 인간적 갈등은 그의 한스러운 죽음에서 잘 표현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몸은 싸늘해진 지 오랜데, 눈물은 따뜻하게 오랫동안 흘러내렸다는 것이다.
즉 시체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 된다.
통탄의 표현치고 이보다 더 강렬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