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화의 두 개의 기둥인 그리스 · 라틴사상, 기독교사상 등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는 곳은 이탈리아다.
일찍이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곳은 그리스사상을 물려받았고, 다시 로마제국을 중개로 하여 이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것은 물론이지만, 로마제국의 멸망 후에도 기독교 교회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는 유럽의 사상과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문학은 유럽의 다른 곳에서 발생한 문학보다도 그리스 · 라틴적인 전통과 기독교적인 전통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개 상반되는 사상이 서로 융합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이탈리아라는 입지조건 때문에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독교 만능 시대였던 중세기에 있어서까지도 이탈리아의 수도사가 사포를 연구했다는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하였을 것이다.
라틴 민족의 특성인 포괄성은 중세기에도 충분히 발휘되어 그 전시대까지만 해도 다른 세계의 것으로서만 생각하던 아라비아 비잔틴 문화를 섭취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 꽃을 피운 르네상스도 단순한 고대 문화의 복구운동이라기보다는 진보적이고도 종합적인 문화운동이 되었던 것이다.
이탈리아문학과 중세 라틴문학 간에 명확한 경계선을 치기는 어렵지만 보통 라틴어에서 하나의 방언으로 파생된 것이 이탈리아어로 문학작품이 씌어지기 시작한 13세기 초엽을 이탈리아문학의 발생기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대개의 작품은 종교적인 것이었으며 성 프란체스코의 <피창조물의 노래>, 야코포네 다 도티의 <찬가> 등이 그 대표작품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중세기적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일종의 문학, 즉 귀부인과 기사와의 연애,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의 모험 등을 노래한 연애시 · 서사시가 출현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프로방스문학의 모방이었다.
당시 스베비아 왕조의 페데리코 2세가 실시한 문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시칠리아 수도인 팔레르모의 궁전은 많은 문인과 시인을 맞아들였다.
그중에는 멀리 바다를 건너온 프로방스의 유명한 음유시인 트루바두르(Troubadour : 중세 남부 프랑스의 음유 시인을 통틀어 이르는 말)들이 많았으며 이들이 시와 시형을 전함으로써 이탈리아풍의 트루바두르가 탄생하게 되었다.
소르델로 디 고이토는 그 대표적 시인의 하나이다.
이 수입문학은 그리스 · 라틴문화, 중세기에 동양적이고 환상적인 아라비아문화, 북유럽의 기사적인 노르만문화 등을 경험한 시칠리아의 온상에서 가다듬어졌고, 차차 모방의 테두리를 벗어나 독자적인 이탈리아 국민문학으로 발전하여 갔다.
이 문학을 보통 시칠리아문학이라고 한다.
당시 여러 도시가 공업 발전으로 차차 부유하게 되자, 영주로부터 자주권을 매수하여 자유도시로 화하여갔다.
특히 토스카나지방에는 피렌체 등 강력한 자유도시가 생겨남으로써 스베비아 왕조는 멸망하게 되었으며, 왕실의 보호를 잃게 된 문화인들은 신생도시로 이주하여 이곳 토스카나지방을 이탈리아 문학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여기에도 음유시인의 서정시 모방은 있었지만 이제는 재래의 연애와는 다른 종교 · 도덕 · 정치를 주제로 한 시가 새로운 운율과 표현을 동반하여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것들은 청신체파라고 부르며 이 파의 시인으로는 카발칸티치노 다 피스토이아 · 단테 등이 있고 이때 처음으로 이탈리아의 문학은 확립된 것이다.
단테는 그의 첫사랑의 여성 베아트리체에 대한 연가 <신생>에 의해서 청신체파 시단의 주체 세력이 되었지만, 그것보다도 망명중에 집필하였다고 하는 불멸의 걸작 <신곡>이라는 장엄한 내용의 대서사시를 완성함으로써 이탈리아문학의 금자탑을 세웠다.
단테의 뒤를 이어 나타난 위대한 작가 페트라르카는 대시성으로서만 아니고 인문학자로서도 뛰어나, 그의 친구들과 더불어 그리스 · 라틴 문헌의 발견 · 수집 · 연구에 몰두하였다.
로마 원로원은 그의 라틴어로 쓴 시 <아프리카>의 고귀한 가치를 인정하여 월계관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자로서의 지위를 한층 더 높인 것은 그의 애인 라우라를 사모하여 노래한 서정시 <칸초니에레>이다.
이 서정시 속에서 우리는 단테에게서 발견할 수 없던 근대적인 우울감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이때의 시인, 작가는 대개 여성과의 관계를 문학을 통하여 표시하였다.
페트라르카 시풍은 문예부흥기를 통하여 스페인 · 프랑스 · 포르투갈 등 전유럽에 번져나가 이탈리아문학의 모방시대를 만들었다.
그 결과 이교주의에 대한 숭배심이 생기고 그후 문학자들이 소재를 그리스 · 로마 신화에서 구하게 되어 일반 대중은 19세기까지 시나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못하였다.
한편 1494년부터 1509년에 이르는 동안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의 계속적인 침입을 받은 이탈리아의 정정은 매우 불안하게 되었으며, 로마와 피렌체가 포위 공격을 당할 상태에 이르자 단테, 페트라르카와는 다른 문학자들의 반항운동이 일어났다.
문예부흥기 다음에 온 17세기는 문학적으로는 침체기였다.
그러나 다음 시대를 위한 준비기라고 볼 수는 있다.
이 시대의 문학가로서는, 후에 마리노주의라는 이름으로 해외에 널리 선전된 파티스트 마리노와 그의 문학적 경향에 반대하고 고전문학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한, 아르카디아 학회에 속해 있던 소수의 문학자밖에는 없었으나 문학활동의 기초가 되는 과학, 철학 등은 열심히 연구되던 시대였다.
18, 19세기에는 이탈리아에 있어서도 낭만주의 문학시대였으나, 이탈리아의 낭만주의는 아르카디아 일파의 이교주의를 배격하고, 기독교적 문학의 재건으로 국민의 애국심을 분발시켜 국가통일을 달성하려는 정치적 색채가 농후하였다.
이 문학운동의 선구자로서는, 아직도 미온적인 존재였던 파리니와 알피에리를 들 수 있으며, 다음에는 기독교 문학자 만조니와 타소, 고전적인 경향을 가진 네오파르디 등이 있었으나, 마지니와 밀라노의 도전적인 기관지 <조정자>에 의해서 이 운동은 절정에 달하여, 드디어 이탈리아는 1815년부터 48년 사이에 단테 이래 염원하여 온, 국가 통일을 성취하게 되었다.
19세기의 문호 카르두치는 반낭만주의로서 고전문학의 부흥을 외친 추종자를 많이 가졌었다.
그중에서도 다눈치오 · 포카차로 · 피란델로 등은 각각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으나, 헤겔의 후계자인 크로체와 파피니는 문예평론가로 활약하여 19, 20세기에 걸친 이탈리아의 문학 번영시대를 출현시켰다.
그러나 제1 · 2차 세계대전과 파시스트시대는 이탈리아문학에 있어서도 시련의 시대였고, 제2차 대전 후에는 다시 많은 문학자가 나타났다.
그중에는 실로네와 같이 사회주의 경향과 오라비아와 같이 실존주의 경향을 띤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가 그리스 · 라틴문학이나 기독교문학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문학사는 이 2대 조류의 교대로 그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따라서 새로운 사조가 여기에 침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