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神曲)
"프란체스카, 당신의 수난은
나로 하여금 슬프고 가슴
아프게 하여 눈물을 금할 길 없나이다.
말씀 좀 해 주셔요.
달콤한 사랑의 탄식을
지니고 계실 때 숨겨진 그 연정이
어떤 일로 어떠한 방법으로
표면화되는 것을 허용하셨는지."
그녀는 나에게 말하나니
"이 비운 속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같이 더욱 뼈아픈 일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대의 스승께서도
이 점 이해하고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사랑의 첫 뿌리를
그대 그리 알려고 애원하오니
흐느끼며 이야기하는 이같이
나 그대에게 말하겠어요.
어느 날 우리 둘은 아무 의도 없이
란치롯또가 사랑에 빠진
이야기책을 읽고 있었지요.
우리는 단 둘이었고 아무
의심도 받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읽어 나가면서
서로 눈이 마주치고
그때마다 서로 얼굴을 붉혔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그 애인의
미소 짓는 입술에 그의 입을
대는 그 구절에 이르러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 후 내 곁을 떠날 수 없게 된 그이,
그의 입술이 경련을 하면서
나의 입과 마주쳤나이다.
가로옷또는 바로 그 책과
그 책을 쓴 이였으니,
그 날은 더 이상 책읽기를
계속할 수 없었나이다."
이렇게 그녀가 이야기하는 동안,
다른 한 혼은 흐느끼고 있었으니
그 애처로움에 나는 마치 죽음을
앞에 둔 이 모양 눈물을
흘리며 마치 시체와 같이
거기에 쓰러졌노라.
* 단테(Alighieri Dante : 1265-1321)는 피렌체 출생으로 예언자 또는 신앙인으로서, 박해를 가한 조국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영원불멸의 거작 <신곡(Divina Commedia)>(1308-1321)을 남겼고, 이것으로 중세의 정신을 종합하여 문예부흥의 선구자가 되어 인류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하였다.
단테는 피렌체의 겔프당(黨 : 敎皇派)의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부친은 알리기에로 디 베를린 치오네, 모친은 벨라라고 하였으나 그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조부는 신성로마 황제를 섬겨 십자군에 참가하여 전몰한 피렌체의 기사 카치아귀다라고 <신곡>의 <천국편> 제15가(歌)에서 밝혀 두고 있다.
그가 9세 때에 마치 천사처럼 청순한 베아트리체를 연모하였음이 시집 <신생(Vita Nuova)>(1295)에 나타나 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그의 시의 형성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단테는 수도원이 경영하는 라틴어학교를 다녔고, 이어서 피렌체의 석학 B.라티니에게 사사하여 문법 ·논리학 ·수사학을 배웠으며 볼로냐대학에서 수사학 · 철학 · 법률학 · 천문학 등을 연구하면서 특히 이탈리아어로 시를 지었다.
그 동안에 동급생인 G.카발칸티와 돈독한 우의를 맺어 고전작가로서는 V.베르길리우스를 탐독하는 한편, 그와 시작(詩作)을 경쟁하여 서로 격려하였다.
그는 시칠리아파(派)와 토스카나의 귀토네파의 서정시에서 받은 영향 아래 베아트리체를 향하여 싹튼 사랑을 읊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청신체파(淸新體派) 시인으로서의 시작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한 남성의 연정을 카발칸티가 주장하는 청신체(dolce stil nuovo)로써는 표현하기가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점차 독자적인 청신체의 시를 쓰게 되었다.
1290년 젊음과 아름다움의 절정기에 있던 베아트리체가 요절하자, 단테가 찬미하는 여성의 이상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신생>의 권말에서 성녀 베아트리체를 위해 대작을 준비하겠다는 결의를 피력하였다.
<신생>은 운문과 산문을 섞은 소품이지만, 그의 거작 <신곡>의 중추가 되는 종교적 ·시적 사상의 싹틈을 엿볼 수 있고, 현실의 여성을 ‘영원한 여성’으로 승화시킨 수법은 당시 유행하던 청신체였다.
이 <신생> 직후 단테의 문학 및 철학에 대한 연구는 넓이와 깊이를 더해갔다.
즉, 문체의 탐구과정에서는 고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 F.호라티우스, N.오비디우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M.T.키케로와 L.세네카에게서는 윤리학을 배웠다.
또한 산타크로체와 산타 마리아 노벨라 등의 두 수도원에 자주 드나들면서 성직자들과 의견을 나누며 베르투스 마그누스와 T.아퀴나스의 철학 및 신학사상을 배웠다.
그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12세에 피렌체의 도나티가(家)의 딸 젬마와 약혼하여 1290년 이전에 결혼하였고, 세 아들을 두었다.
1287년 볼로냐로 가서 1289년에 기병대의 일원으로 칸바르디노에서 아레초의 기벨린당(黨 : 皇帝派)의 군대와 전투를 하기도 하여 청년시절에는 갖가지 경험을 쌓았다.
1293년의 사회개혁법에 의하여 귀족의 공직금지가 선포되어 조합(組合)의 가입자만이 특례를 인정받게 되자, 단테도 ‘의사 및 약종업조합’에 등록하여 129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 피렌체 도시국가에 특별참여, 1295년 12월 14일에는 통령(統領)선거를 위한 자문기관의 위원, 1296년 5∼9월까지는 재정을 결정하는 100인위원회 위원, 1300년 5월에는 이웃나라 생 제미냐노의 특파대사를 거쳐, 마침내 통령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6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재임하였다.
당시 피렌체는 흑 ·백(黑白) 양당으로 갈라져, 단테는 백당에 소속하여 흑당의 힘을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흑당은 로마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의 야심을 이용하였다.
흑당에 동의해서 카를로 바르와의 군대가 피렌체로 입성하여, 단테는 흑당에 의하여 추방되었다.
1302년 1월에는 독직죄로 고소당하여 무거운 벌금과 2년간의 유형(流刑)을 선고받았으며, 다시 2개월 후에는 영구유형을 선고받고, 시정부(市政府)에 체포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통고를 받았다.
<신곡>의 첫머리에 있는 “어두운 숲을 헤맨다”는 표현은 단테가 35세 때인 1300년 유랑의 길을 떠나기 직전 그의 양심 ·예지 ·신앙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현이다.
그로서는 이 부당한 단죄에 대한 반항은 백당의 잔당에 가담하여 피렌체를 다시 탈환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백당은 1303년과 그 이듬해에도 패배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단테만이 일인일당(一人一黨)으로 남았으며, 유랑의 나그네 길은 더욱 고난과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낙담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고, 인류 구제의 길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먼저 지옥에 가서 인간이 범한 죄의 실체와 이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보아야 한다고 스스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인간사회의 모습을 샅샅이 관찰하여 그 가운데서 멸망하는 것과 영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백당의 최후의 일인으로 남은 단테는 1303년 유랑의 길에서 베로나의 스칼라가(家)의 외교사절이 되기도 하고, 1306년 마라스피나의 식객이 되기도 하면서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
1306-1308년 사이에 단테는 <향연(Convivio)>을 썼다.
이것은 서장과 14장으로 되어 14개의 칸초네를 넣을 예정이었으나 실제는 3개의 칸초네만을 주석(注釋)하여 미완으로 그친 것은 그 무렵에 이미 <신곡>의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연>의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및 스콜라 철학이고, 주로 윤리문제를 다루고 있다.
1304-1307년에 단테는 <속어론(俗語論):De Vuigari eloquentia>을 썼는데 이것은 라틴어의 논문으로 언어문제와 시작을 다루었으나, 이 작품도 제2권 제14장으로 중단하여 미완으로 끝났다.
1310년 신성로마 황제가 되기 위하여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내려왔을 때, 이 고행의 시인은 모든 악에서 이탈리아가 풀려날 것으로 믿고 열렬한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모든 겔프당(黨)의 도시는 맹렬히 하인리히 7세에게 반항하였고, 1313년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단테의 피렌체 귀환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 동안에 그는 라틴어로 <제왕론(帝王論)>(전 3권)을 썼다.
그는 제1권에서 정의와 평화의 확립을 주장하였고, 제2권에서 제국은 각 시민이 선출한 정부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하고, 이는 신의 가호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제3권에서는 교황과 제왕을 분리하여 교황은 정신계를, 제왕은 물질계를 다스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315년 <피렌체의 친구에게 보내는 서간>에서는 모욕적 대특사(大特赦)를 거부하였다.
이 해에 피렌체 정부는 단테 및 그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1318년 이후 라벤나의 영주 G.N.폴렌타는 유랑시인 단테에게 안식할 땅을 제공하여 세 아들은 성직자가 되고, 단테는 <신곡>을 완성하였다.
최대의 걸작 <신곡>은 단테의 문학적 ·종교적 사상의 결정(結晶)으로, <지옥편>은 1304-1308년에, <연옥편>은 1308-1313년에, <천국편>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7년 동안에 완성하였다.
또한 그의 <농경시(農耕詩)>는 친구인 볼로냐대학 교수 G.데르 비르지리오에게 보낸 목가(牧歌)이다.
1302년 초에는 베로나에 가서 <수륙론(水陸論)>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신곡> <천국편>의 제25장 첫머리에서 그는 피렌체 시민이 자신을 계관시인(桂冠詩人)으로 맞이해 줄 것을 희망하였으나, 1321년 9월 라벤나 영주 폴렌타의 외교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는 길에 죽음으로써 그의 그러한 꿈마저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폴렌타는 이 시인의 죽음에 대하여 최대의 애도를 표하고, 라벤나의 땅에 묻었다.
그 묘소의 건조는 내란으로 인하여 천연(遷延)되다가, 1482년 B.벰보가 조각가 P.롬바르도에게 명하여 완성시켰다.
<신곡>은 이탈리아의 시성(詩聖)인 단테의 대표작으로, <지옥편> <정죄편> <천국편>으로 나뉘어 각 33장씩으로 되었고, 서장을 포함해 100장으로 된 장편 서사시다.
여기 소개된 부분은 <지옥편>의 5장에서 부정한 사랑을 범하여 영원히 벌을 받고 있는 바오로와 프란체스카의 슬픈 이야기를 노래한 부분이다.
부정한 사랑의 시말을 이야기하며 참회하는 내용으로 된 이 부분에서 단테의 도덕관을 짐작할 수 있다.
나와 프란체스카의 대화 형식으로 된 이 부분은 <신곡>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으로 말해진다.
현재까지 <신곡>의 의미는 각인각색 여러 가지로 정의되고 있으나 가장 정확하다고 믿어지는 것은, 단테가 시에 의하여 이룬 ‘보복’인 것이라고 하는 정의일 것이다.
그는 전통 있는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보잘 것 없는 생활로 전락되고, 탁월한 지배를 희망하면서 식객의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되었고, 교회의 도덕적 개혁을 희망하면서도 보니파키우스 8세의 희생물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게도 안되고 피렌체는 그가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다.
이 일체의 굴욕과 오산을 씻기 위하여 그는 시에 의해 ‘보복’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죠반니 빠삐니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미리 행해진 최후의 심판’이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두산백과 참조)
눈물속에 핀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