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미국

오든

높은바위 2015. 5. 27. 09:17

 

 

      어느 날 저녁 외출하여

 

어느 날 저녁 외출하여

브리스틀 거리를 거닐었을 때

포도 위의 군중들은

수확철의 밀밭이었다.

 

넘칠 듯한 강물 가를 거닐었을 때

한 애인이 철로 아치 아래서

노래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사랑은 영원하여라.

 

그대여, 나는 그대를 사랑, 사랑하리라.

중국과 아프리카가 합쳐질 때까지

강이 산을 뛰어 넘고

연어가 거리에서 노래할 때까지

 

나는 사랑하리라, 바다가

겹쳐서 매달려 마를 때까지

그리고 일곱 별들이 하늘을 회전하며

거위처럼 꺼억꺼억 울게 될 때까지

 

세월은 토끼처럼 뛸 것이다.

내 두 팔 안에 세월의 꽃과

세계의 첫 사랑이

안기어 있으니.

 

그러나 거리의 시계들은 모두가

윙 하고 돌면서 울리기 시작한다.

아, 시간에 속지 말지니라.

너희는 시간을 정복할 수가 없다.

 

공정이 드러나 있는

악몽의 흙더미 속에서

시간은 그늘에서 바라보며

너희가 키스할 때 기침을 한다.

 

두통과 근심 속에서

생명은 부지중에 새어 나간다.

그리고 시간은 망상을 한다.

내일이니 오늘이니.

 

여러 푸른 골짜기에

무섭게 눈이 뒤덮인다.

시간은 얽힌 춤을 부수고

잠수부의 빛나는 몸을 부순다.

 

아, 너의 손을 물 속에 잠그라.

두 손을 손목까지 잠그라.

들여다보라. 그 물그릇을 들여다보라.

그리고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라.

 

빙하가 천장에서 덜컹덜컹 울고

사막이 침대에서 한숨 짓는다.

차주전자의 터진 금은

죽음의 나라로 가는 입구이다.

 

거기서는 거지가 지폐를 걸고

거인은 잭을 홀리게 한다.

백설 소년이 큰 소리로 외치고

질은 누워서 미끄러져 떨어진다.

 

아아, 그 거울을 들여다보라

거기 비친 네 불행을 들여다보라

사람에게 축복은 줄 수 없어도

살고 있다는 것은 역시 행복되다.

 

아아, 어서 창문 가에 서 보아라.

흐르는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릴 때

그대의 그 비뚤어진 마음이

비뚤어진 이웃을 사랑할 때이다.

 

이미 밤도 아주 깊어 버렸고

연인들도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시계도 이제는 울기를 멈추었고

강물은 깊숙하게 변함없이 흐른다.

 

 

 

* 위스턴 오든(Wystan Hugh Auden : 1907-1973)은 영국 요크셔 출생으로,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미국에 귀화한 영국 태생의 시인으로 T·S·엘리어트 이후 최대의 시인으로 꼽힌다.

1930년대에 과격한 발언과 실험적 시법의 개척으로 알려진 이른바 ‘1930년대 시인’의 중심인물로서 영국시단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C.D.루이스, S.스펜더, L.맥니스 등은 작품의 내용이나 시풍마저 오든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개인적인 친분도 있어 일괄하여 ‘오든 그룹’이란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영국시절의 대표작에는 <시집(Poems)>(1930), <연설자들(The Orators)>(1932), <보라 여행자여(Look, Stranger!)>(1935), 이 밖에도 C.이셔우드와 합작으로 쓴 시극이나 맥니스와의 합작인 자서전적 아이슬란드 기행시, 에스파니아 내란을 주제로 한 유명한 시편 등이 있다.

사상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인 측면에서 좌경적이기는 하였으나, 동시에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도 컸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핍박받는 빈민의 비참함과 비정의 사회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도사리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로서의 개인적인 염원이 있어 이 양자의 상극 또는 조정이 시의 주제였다.

 

기법면에서도 고대 영시풍의 단음절 낱말을 많이 써서 조롱이 섞인 경시와 모멸을 덧붙인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의 국적을 취득한 후로는 영국 성공회에 귀의하여 작품도 현저하게 종교적 색채를 더해 갔다.

주요 작품에는 <새해의 편지(New Year Letter)>(1941), <한동안(For the Time)>(1945), <불안의 시대(The Age of Anxiety)>(1947), <아킬레스의 방패(The Shield of Achilles)>(1955), <클리오의 찬가(Homage to Clio)>(1960) 등 다수가 있다.

 

 

이 시는 1937년 11월의 작품이다.

Spears는 Auden 자신의 말로 <Pastiche of folksong> 이라고 소개하면서도, 오든의 발라드 가운데서 최고 걸작이라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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