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독일

볼프 비어만(Karl Wolf Biermann)

높은바위 2023. 8. 18. 07:20

 

변하는 자만이 지조를 지킨다

 

난 피를 통과해 거대한 빛 속으로 헤엄쳤네

호기심에 가득 차 배에서 나왔지

난 동물이었어. 그리고 인간이었지

처음부터 그리고 난 배웠어

게스타포에게서 심문당하는 상황에서도

부끄럼 없이 어머니 젖을 빨았고

모유와 함께 그 진리를 배웠지

변하는 자만이 지조를 지킨다

 

함부르크에서 도망쳐 나와

열여섯 살 때 약속의 나라로 갔지

그때 수백만 명이 나와 같은 길을 갔지만

단지 반대 방향으로 줄달음쳤지

난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지

새로운 집으로! 여행은 새로운 게 아니야

젊은이는 조국을 찾는 법이지

변하는 자만이 지조를 지킨다

 

그렇게 난 저쪽에 도착했지.

어린아이처럼 맹목적으로 열광했어

곧 나는 붉은 신들 역시

인간이요 돼지요 개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내 아버지는 거짓말이나 되씹으라고

날 만들지 않았어

그렇기에 난 내 진실을 큰소리로 외쳤지

변하는 자만이 지조를 지킨다

 

더우나 추우나, 전쟁은 늘 있었지

난 서에서 동으로 다시 서쪽으로 갔지

내 무기인 기타와 연필을

단단히 붙잡고서 말이야

난 내 본연의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었지

절반은 유태인 자식으로, 절반은 비유태인으로

그렇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았지

변하는 자만이 지조를 지킨다

 

여자에 관한 한 난 복이 많았지

난 풋내기였고 눈이 멀었었지

하지만 여자들 역시 인간이라는 걸

처음부터 머릿속에 담고 있었지

이제 난 내 마누라를 기쁘게 해 줄

세밀한 부분을 알고 있지

남정네들의 지배는 날 구역질 나게 만든다고

변하는 자만이 지조를 지킨다

 

처음부터 난 절망했었지

그리고 언제나 다시 새롭게 희망을 품었지

인간은 이렇게 사는 거야. 조만간 죽음이 닥쳐오겠지

난 친구 하인을 잘 알고 있지. 그를 자주 만났었지

그는 내 적으로 남아 있지, 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운 맞춰진 장미꽃을 뿌리지 않을 거야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난 쉰 소리로 말할 거야

변하는 자만이 지조를 지킨다

 

 * * * * * * * * * * * * * *  

 

Nur wer sich ändert, bleibt sich treu

 

Ich schwamm durch Blut in das große Licht

Neugierig kam ich aus dem Bauch

Ich war ein Tier. Und ich war ein Mensch

Von Anfang an und lernte auch

Bei der Gestapo im Verhör

Soff ich am Busen ohne Scheu

Die Wahrheit mit der Muttermilch:

Nur wer sich ändert, bleibt sich treu

 

Von Hamburg bin ich dann abgehaun

Mit Sechzehn ins Gelobte Land

Da sind Millionen den gleichen Weg

Wie ich, bloß umgekehrt gerannt

Ich wollte von zuhause weg

Nach Haus! Die Reise ist nicht neu:

Wer jung ist, sucht ein Vaterland

Nur wer sich ändert, bleibt sich treu

 

So kam ich drüben an: ohne Arg

Und blindbegeistert wie ein Kind

Bald sah ich, daß rote Götter auch

Nur MenschenSchweineHunde sind

Mein Vater hat mich nicht gemacht

Damit ich Lügen wiederkäu

Drum schrie ich meine Wahrheit

aus: Nur wer sich ändert, bleibt sich treu

 

Heiß oder kalt, immer war da Krieg

Ich ging von West nach Ost nach West

Und hielt mich an meinen Waffen: die

Gitarre! und am Bleistift fest

Ich bleibe, was ich immer war:

Halb Judenbalg und halb ein Goj

Und eines weiß ich klipp und klar:

Nur wer sich ändert, bleibt sich treu

 

Mit Weibern habe ich nichts! als Glück

Gehabt. Ich war so grün und blind

Und wußt nur vorne im Hinterkopf

Daß auch die Weiber Menschen sind

Nun weiß ich bis ins kleinste Teil

Mit dem ich meine Frau erfreu:

Die Männerherrschaft stinkt mich an

Nur wer sich ändert, bleibt ein Mann

 

Ich war verzweifelt von Anfang an

Und immer hab ich neu gehofft

so kann man leben. Bald kommt der Tod

Ich kenn Freund Hein, ich traf ihn oft

Er bleibt mein Feind, dem ich auch nicht

zum Schluß gereimte Rosen streu

Mit letzter Puste krächze ich:

Nur wer sich ändert, bleibt sich tr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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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프 비어만(Karl Wolf Biermann, 1936년 11월 15일 ~ )은 독일의 음유시인이며 구동독의 반체제 저항시인이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아버지 다고베르트 비어만과 어머니 엠마 비어만의 외아들로 출생한다. 

공산주의자이며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 석 달 전 나치에게 체포되어 8년간의 옥살이 끝에 1943년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된다.

죄목은 함부르크 조선소에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지하 공산주의 신문을 제작, 유포하고 태업을 주도했다는 것이었다.

독일공산당 당원이었던 어머니는 아들이 공산주의자로서 인류를 구원하는데 일조하는 인물이 되길 원했다.

1953년 17세에 홀로 서독 함부르크에서 동독 베를린으로 이주한다.

 

동독으로 이주한 후 가데부슈(Gadebusch)의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1955년 대학입학자격시험(Abitur)에 합격하고 동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정치경제학 공부를 시작한다.

1957년 학업을 중단하고 2년간 브레히트가 창설한 베를린 앙상블의 연출조수로 일하기 시작한다.

브레히트의 변증법적 연극을 학습하며 순수예술보다는 참여예술을 중시하는 브레히트의 계몽주의적 문학관을 습득한다.

1959년 훔볼트 대학에 복학하고 전공을 철학과 수학으로 바꾼다.

 

1961년 프렌츨라우어 베르크(Prenzlauer Berg)에 위치한 양계장을 극장으로 개조하여 '베를린 노동자 및 대학생극단(Berliner Arbeiter- und Studententheater)'을 창설한다.

1962년 처녀작인 <<베를린 결혼식(Berliner Brautgang)>>이 베를린 노동자 및 대학생극단 창단기념연극으로 시연되지만 끝내 공연되지 못하고 당의 검열에 의해 공연금지 조치를 당한다.

12월 동독예술원 시예술분과위원회의 주관으로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서정시의 밤'에 출연해 동독 문학계에 공식적으로 데뷔하지만 이 자리가 동독에서 공식적으로 출연한 마지막 무대가 된다.

 

1963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부에 의해 비우호적 인물로 분류되고 공산당 당원 자격을 박탈당한다.

1965년 9월 첫 시집 <<철삿줄 하프(Die Drahtharfe)>>가 간행되었다.

이 시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시집 중 하나이다.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는 비어만의 첫 시집을 "서투르게 위장된 속물적·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사회질서와 당조직 체계를 격렬하게 모욕"한 부적절한 사례로 지목하고 비어만을 가택연금시키고 공연금지 처분을 내린다.

 

1968년 두 번째 시집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혀로(Mit Marx- und Engelszungen)>>가 출간되고, 첫 번째 미니 앨범 <네 편의 신곡(Vier neue Lieder)>이 출시된다.

1972년 세 번째 시집 <<나의 동지들을 위하여>>가 출간된다.

1973년 음악저널 포노 포름(Fono Forum)에서 세 번째 정규앨범 <더 나은 시절을 기다리지 말라>로 독일음반상을 받는다.

1974년 서독의 쾰른시가 수여하는 자크 오펜바흐상(Jacques-Offenbach-Pries)을 받는다.

동독 문화관료들은 서독으로 가려면 동독시민권을 포기하거나 영원히 동독을 떠나라고 협박하였고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한다.

 

1976년 11월 13일 서독 금속노조(IG-Metall) 초청으로 쾰른 시 체육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갖는다.

6,500명의 청중이 운집하였고 독일연방공영방송국(ARD)에서 콘서트를 실시간으로 중계하였다.

11월 16일 동독정부는 볼프 비어만의 시민권을 강제로 박탈하는 추방령을 발표하였다.

그는 다음 공연장소인 보쿰으로 이동하는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추방령의 근거는 «독일민주공화국 시민권에 관한 법률» 13조, 시민의 의무를 현저히 위반한 시민에게는 독일민주공화국의 시민권이 취소될 수 있다는 조항이었다.

11월 19일 비어만은 시민권 박탈의 부당함을 천명하며 자신의 동독 귀환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볼프 비어만의 시민권 박탈로 동독 국민들은 정부에 크게 실망하였다.

11월 17일 동독 문단을 대표하는 저명 작가 12명, 슈테판 헤름린(Stephan Hermlin), 슈테판 하임(Stefan Heym), 에리히 아렌트(Erich Arendt), 폴커 브라운(Volker Braun), 크리스타 볼프(Christa Wolf), 게르하르트 볼프(Gerhard Wolf), 자라 키르쉬(Sarah Kirsch), 프란츠 퓌만(Franz Fühmann),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 롤프 슈나이더(Rolf Schneider), 유렉 베커(Jurek Becker), 권터 쿠너트(Günter Kunert)가 추방령에 반대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한다. 

 

시민권 박탈 이후, 1977년 서방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시낭독회와 콘서트를 열었다.

1980년 독일 사민당 홍보대사로서 선거전에 뛰어들어 독일 각지를 돌며 선거캠페인을 벌인다.

1981년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프랑스 파리에 2년간 체류한다.

1983년 오하이오 주립대학 객원교수로서 미국에 체류하고 미국 여러 도시에서 콘서트를 연다.

1989년 12월 동독 당국의 반체제 인사 복권 결정에 따라 동독 라이프치히 박람회장에서 콘서트를 갖는다.

 

2005년 방한하여 한국 저항문화의 상징인 김민기의 소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2006년 독일연방정부의 대공로십자훈장을 받는다.

 

현재 부인과 함께 함부르크 알투나에 거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