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대가족주의(大家族主義)의 비정사(非情史)

높은바위 2024. 11. 27. 07:21

 
경남 하동(河東) 옥종면(玉宗面) 종화골에서 안계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가마고개"로 불린다.
광해군 때 일이라 구전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통을 이어받은 종화골의 한 명문 집안에서 딸을 출가시키고자 가마행차를 하였다.
공교롭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어받은 안계골의 한 명문 집안에서도 딸을 출가시키고자 가마행차를 하였다.
이 양가는 수백년래 명문을 두고 다투어 왔으며 학통(學統)을 달리 한 것도 그 적대의식 때문이었다.
이 적대문명의 가마가 하필이면 이 고갯마루에서 부딪치게 되었다.
비록 좁은 고갯길이긴 하지만 가마가 못 비켜 갈이만큼 좁진 않았다.
고개 아래는 낭떠러지로 남강(南江)의 지류(支流)인 덕천강(德川江)이 흐르고 있고―.
 
어느 한쪽의 가마가 비켜주거나 비켜가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데 그들의 골수에 사무친 가문의 의식은 그 같은 겸양을 철저히 배제하고 대치하고만 있었다.
비켜가는 가마 쪽의 가문이 굽힌다는 치열한 의식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구전된 바로는 사흘을 버티었고 각기 가문에서 응원온 문중이 초막을 치고 버티는가 하면, 신부가 오지 않는 각기 신랑집에서도 달려와서 대치하게 되었다 한다.
그뿐 아니라 퇴계(退溪)의 문하와 남명(南冥)의 문하까지도 인근 고을에서 몰려들어 대치하였다고도 한다.
퇴계의 문하와 남명의 문하는 서로의 학문을 헐뜯어 사이가 좋지 않던 때였기에, 이 가마고개의 대치는 차츰 큰 뜻을 지니게 되었다.
 
이 가마고개에서 있었던 일은, 한국적 사유방식의 가장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 사회의 구성단위는 대가족이었다.
숱한 정치적 문란과 잇따른 외침이 사회의 가난을 가져옴에 따라, 각자의 생활의존을 친족공동체인 대가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데 그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구성원의 개인은 그 대가족을 위해 소멸해야 하며, 희생을 강요받았다.
그 대신 나라가 망한다는 건, 가문이 망한다는 것보다 절실하지도 않고, 실감이 나질 않았다.
 
가문을 위해 목숨은 바칠 수 있어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진 않는다.
대가족주의의 사회구조는 국가지상주의의 적이다.
따라서 한국은 역사상 한 번도 침략국이 돼보지도 못했으며 침략만을 받았고, 이 침략이 가져온 빈곤이 대가족주의를 조장하는 악순환을 거듭해 온 것이다.
가문의식은 이같이 다져지고, 그 가문의 명예는 국가나 개인의 생명보다 한결 높은데 있어 왔다.
 
가마고개의 대결은 이런 절박한 상황 때문에 탈출구를 못 찾는다.
가문의 명예를 내건 그 마당에 시집을 간다는 것, 그리고 가문의 극히 조그마한 요소인 딸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양가의 가문은 그 대결의 불씨가 된, 시집가는 딸에게 각기 자결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가문의 명예를 구제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두 시집가던 딸은 가문의 어른들이 짐짓 가마 속에 넣어준 무거운 돌덩이를 붉은 비단치마에 싸서 안고 덕천강 벼랑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들의 신방은 바로 무덤이었다.
 
이건 흔히 있는 한국 비정사(非情史)의 극히 많은 한 실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가문전쟁의 고전장(古戰場)은 "가마고개"로 불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