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기 유학자 圃隱(포은) 정몽주(鄭夢周) 뒤에 우리나라 성리학이 실로 김굉필(金宏弼)로부터 주창됐는데, 뜻을 같이 한 이가 정여창(鄭汝昌: 조선 성종 때의 문신ㆍ학자(1450~1504). 자는 백욱(伯勖). 호는 일두(一蠹). 시호는 문헌(文獻). 성리학의 대가로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무오사화에 관계되어 귀양 가서 죽었다.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에 그 유집(遺集)이 전한다.)이다.
김굉필이 이(理)에 밝고 정여창은 수(數)에 밝았는데 불행한 때에 가서 비명에 죽으니 아깝도다.
푸르른 하늘이라 어떻다 말하랴. ≪丙辰丁巳錄(병진정사록)≫
그의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은 이시애의 난에 죽고 편모슬하에서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의 효도는 한국의 한 극한적인 효도방식으로 주의를 끈다.
≪연원록(淵源錄)≫에 보면 그의 어머니가 이질을 앓았을 때 향을 피워놓고 어머니의 아픈 몸을 자신의 것과 바꿔달라고 빌면서, 그 아픔을 앓기 위해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피가 적삼을 적셨던 것이다.
이 자학효도는 이색적인 것으로 정여창이 독창한 것인지 관습적인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는 술을 먹지 않는다.
젊을 때 폭주가이던 그가 먹지 않게 된 계기는 그의 어머니의 꾸지람이었다.
"너의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네가 이와 같이 행동하면 내가 누구를 믿고 살겠느냐."는 말을 듣고 금주한 것이다.
그는 소고기도 먹지 않는다.
그 계기도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느 향회(鄕會) 때 당시 가뭄으로 국금 되었던 소고기를 내어놓았다 하여 문책받았는데, 이때 끼친 어머니에의 근심에 충격을 받아 단육(斷肉)을 하였다.
"네 행실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구나."
성종이 그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는 감성적인 것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기에 철저한 반시(反詩) 주의자다.
"시란 성정(性情)에서 발로 하는 것이니, 어찌 힘써 그를 공부할 것인가." ≪秋江泠話(추강령화)≫
그의 평생에 단 한 수의 시를 지었는데, 성정배척의 반시주의자가 유일하게 남긴 시라 하여 유명하다.
바람에 잎사귀가 새록새록하니
사월 화개(花開) 고을
벌써 보릿가을 이고녀
두류산(頭流山) 천첩 만첩 돌아본 후에
외로운 배 타고
큰 강 따라 내린다.
그는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치고는 재산 분배를 매우 고르게 하여, 사람들이 흠잡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난한 누이가 집을 지을 때 그는 자기 집의 기와를 걷어다가 지붕을 이어 주었다 한다.
이후 진산(晉山)의 악양동(岳陽洞)에 터를 잡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