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실(朴實)의 효행에 관해 기록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동각잡기(東閣雜記)"의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아버지 박자안(朴子安)은 태조 때 경상, 전라도의 도안무사(都按撫使)로서 항복한 왜적들의 처리를 한 일이 있다.
그때 왜인에게 군사기밀을 알리는 말을 하였기로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한 소년이 그 경비가 삼엄한 구중궁궐을, 애걸, 매수, 월색(越穡), 야행(夜行) 등 갖은 수단을 감행하여 태조의 대전 앞까지 잠행하였던 것이다.
대뜸 통곡을 하니, 태조가 나와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땅에 뒹굴며 아버지의 구명을 애걸하였다.
태조는 이 궁궐을 뚫고 들어올 수 있었던 그 소년의 효행에 압도되어 버렸다.
태조는 한시바삐 구명사절을 보냈다.
교서가 당도하던 날에, 관에서 자안(朴子安)의 형을 집행하려고, 얼굴에 칠을 하고, 옷을 벗겨 칼을 차려 놓았는데,
우연히 벌판을 바라보니, 한 사람이 달려오면서 갓을 휘두르므로,
관원이 이상하게 여겨 형집행을 멈추고 기다렸기로 구명이 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본래 학술이나 무예에 뛰어나지 않았으나, 참형(斬刑)을 당하게 된 아버지를 구명한 박실(朴實)은, 금려(禁旅=近衛兵 : 예전에, 궁궐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하며 경비하는 군대를 이르던 말. 고려와 조선 시대에 주로 기마병으로 조직되었다.)로서 특채되었고, 보은충(報恩忠)을 극진히 하였기로 당상관까지 올랐던 것이다.
박실이 죽자 세종은 2일간 철시를 명하고 치제(致祭)하였다.
근대인물로는 항일지사 박열(朴烈:1902년 3월 12일 ~ 1974년 1월 17일)이 그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