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기둥에 머리찧는 자학효도(自虐孝道)의 정여창(鄭汝昌)

높은바위 2024. 12. 1. 07:22

 

고려말기 유학자 圃隱(포은)  정몽주(鄭夢周) 뒤에 우리나라 성리학이 실로 김굉필(金宏弼)로부터 주창됐는데, 뜻을 같이 한 이가 정여창(鄭汝昌: 조선 성종 때의 문신ㆍ학자(1450~1504). 자는 백욱(伯勖). 호는 일두(一蠹). 시호는 문헌(文獻). 성리학의 대가로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무오사화에 관계되어 귀양 가서 죽었다.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에 그 유집(遺集)이 전한다.)이다.

김굉필이 이(理)에 밝고 정여창은 수(數)에 밝았는데 불행한 때에 가서 비명에 죽으니 아깝도다.

푸르른 하늘이라 어떻다 말하랴. 丙辰丁巳錄(병진정사록)

 

그의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은 이시애의 난에 죽고 편모슬하에서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의 효도는 한국의 한 극한적인 효도방식으로 주의를 끈다.

≪연원록(淵源錄)≫에 보면 그의 어머니가 이질을 앓았을 때 향을 피워놓고 어머니의 아픈 몸을 자신의 것과 바꿔달라고 빌면서, 그 아픔을 앓기 위해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피가 적삼을 적셨던 것이다.

이 자학효도는 이색적인 것으로 정여창이 독창한 것인지 관습적인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는 술을 먹지 않는다.

젊을 때 폭주가이던 그가 먹지 않게 된 계기는 그의 어머니의 꾸지람이었다.

"너의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네가 이와 같이 행동하면 내가 누구를 믿고 살겠느냐."는 말을 듣고 금주한 것이다.

 

그는 소고기도 먹지 않는다.

그 계기도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느 향회(鄕會) 때 당시 가뭄으로 국금 되었던 소고기를 내어놓았다 하여 문책받았는데, 이때 끼친 어머니에의 근심에 충격을 받아 단육(斷肉)을 하였다.

 

"네 행실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구나."

성종이 그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는 감성적인 것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기에 철저한 반시(反詩) 주의자다.

"시란 성정(性情)에서 발로 하는 것이니, 어찌 힘써 그를 공부할 것인가." ≪秋江泠話(추강령화)≫

 

그의 평생에 단 한 수의 시를 지었는데, 성정배척의 반시주의자가 유일하게 남긴 시라 하여 유명하다.

 

바람에 잎사귀가 새록새록하니

사월 화개(花開) 고을

벌써 보릿가을 이고녀

두류산(頭流山) 천첩 만첩 돌아본 후에

외로운 배 타고

큰 강 따라 내린다.

 

그는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치고는 재산 분배를 매우 고르게 하여, 사람들이 흠잡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난한 누이가 집을 지을 때 그는 자기 집의 기와를 걷어다가 지붕을 이어 주었다 한다.

이후 진산(晉山)의 악양동(岳陽洞)에 터를 잡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