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신 석 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 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마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 오던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조선일보> 1933.11
1.이 시는 어떤 상황을 노래한 것인지 상상하여 한편의 이야기로 꾸며 봅시다.
어느 날 저녁, 시인은 푸른 잔디 위에 앉을 기회가 있었다. 하늘에 새가 날고 풀 위에서 어린 양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그야말로 한 폭의 서양화같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점점 어둠은 다가오고 붉은 저녁놀이 하늘을 덮었다. 시인은 그 아름다운 정경이 못내 아쉬웠다. 이윽고 저녁 안개도 자욱하게 깔려가고 황혼의 아름다움은 사라져가는 것이었다. 불을 켜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불을 켠다는 것은 어둠이 온다는 이야기니까.
2.이 시는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는 단순한 구조속에 이미지의 통일을 이루면서 자연에 대한 예찬과 자연을 아끼는 심상이 잘 드러난 전형적인 목가시라고 할 수 있다. 긴 호흡의 명상적 리듬과 차분한 정서 등도 잘 나타나 있다. 쉽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가운데 조화를 이룬 시적 가락, 자연의 색채가 빚어 내는 친밀감과 타고르다운 환상과 동화적 낭만의 세계를 느낄수 있으며 동양 노장사상(老莊思想)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시상을 함축하였다.
이 시의 특징을 살피면 첫째, 3연의 자유시로서 반복 효과의 묘미를 살리고 있다. 즉, 유사한 시어나 의미수를 반복하여 반복 운율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설의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셋째, 호소력있는 공손한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외경적인 대상인 자연과 결합하여 정중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만일 이런 어법을 상요하지 않았다면 이 시는 딱딱한 시가 되었을 것이다. 넷째, 비유로서 직유,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어머니’의 심상은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에서와 같이 리듬을 살리기 위한 기능을 갖기도 하며 소망과 염원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시가 정겹고 온화한 목소리를 가지는 것도 이 ‘어머니’의 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3.구성
황혼 무렵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1연)
자연의 모습에 대한 새로운 인식(2연)
이상향에의 동경(3연)
4.이 시의 핵심적 요소는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이 시에서 중요한 심상 중의 하나는 ‘촛불’이다. 이것은 황혼의 아룸다움과 대치되는 낱말이기 때문에 하나의 상징성을 띤다. ‘초록빛’이 감각과 성장, 희망의 심상을 갖고 있다면 , ‘촛불’은 어둠, 공포의 원형적 심상을 갖고 있다. ‘자연’은 ‘촛불’과 대조적인 관계로, 이 시인이 거부하는 대상이 바로 ‘촛불‘이다. 따라서 ’촛불‘은 일반적 심상으로 이해되는 광명적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쪽에서의 암흑이나 반자연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암담한 현실상황을 벗어난 이상적인 세계를 설정하여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는 한 시작 태도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5.주제
황혼녘의 아름다운 정경에 대한 애착
이상적인 전원 세계의 동경
자유로운 삶에의 소망
6.지은이 소개
신석정:「그 먼나라를 알으십니까」 참조.
7.생각해 봅시다.
(1) 일반적인 ‘촛불’의 심상과 이 시에서의 ‘촛불’의 심상을 구별해 보자.
*「핵심적 요소」 참조.
(2) 이 시와 같이 자연 귀의를 노래한 고시조를 하나 외워 쓰라.
* 8번 항 참조
8.이 시는 어떤 작품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 시와 같이 자연귀의(自然歸依)를 노래한 것은 우리 시사에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강호사시사」(맹사성), 「고산구곡가」(이이),「농암에 올아 보니-」(이현보), 「어부사시사」(윤선도), 「상춘곡」(정극인), 「두류산 양단수를 -」(조식), 「말 업슨 청산이요-」(성혼), 「전원에 봄이 온이-」(성혼), 「지당에 비뿌리고-」(조헌), 「지란을 갖고랴-」(강익), 「산촌에 눈이 오니-」(신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