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16. 招 魂

높은바위 2005. 6. 2. 06:07
 

16. 招    魂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여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우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여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1925년. 시집 ꡔ진달래꽃ꡕ



* 이 시는 사랑하는 임을 잃은 슬픔을 애절한 목소리로 절규하듯이 노래한 작품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喪禮의 한 절차인 고복 의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다. 민간에서 흔히 ‘招魂’이라 불리는 이 의식은 사람의 죽음이 곧 혼의 떠남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이미 떠난 혼을 불러들여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려는 간절한 소망이 의례화 된 것으로서, 사람이 죽은 직후에 그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번 부르는 행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즉, 초혼은 죽은 사람을 재생시키려는 의지를 표현한 일종의 ‘부름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는 고복 의식의 문학적 재현을 위한 의도적인 표현 장치가 이루어져 있다. 즉 亡者의 이름을 직접 세번 부르는 고복 의식의 절차가 재현되어 있는데 - 1연의 ‘이름이여’, 2연의 ‘그 사람이여’, 5연의 ‘이름이여, 그 사람이여’의 3회에 걸친 부름의 형식 - 그것은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던 사람의 재생을 간절히 소망하는 시적 자아의 의지와 염원을 효과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장치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