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152.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높은바위 2005. 7. 31. 09:40
 

152.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고   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 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지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 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무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엉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1984. ꡔ조국의 별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