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140. 紫霞門 밖

높은바위 2005. 7. 28. 06:30

 

140. 紫霞門(자하문) 밖

 

                                 김 관 식

 

  나는 아직도 청청히 어우리진 수풀이나 바라보며 병을 다스리고 살 수 밖엔 없다. 혼란한 꾀꼴새의 매끄러운 울음 끝에 구슬 목청을 메아리가 도로 받아 얼른 또 넘겨 빽빽한 가지 틈을 요리조리 휘돌아 구을러 흐르듯 살아가면 앞길은 열리기로 마련이다.

 

  사람이 사는 길은 물이 흘러가는 길.

山마을 어느 집 물항아리에 나는 물이 되어 고여 있다가 바람에 출렁거려 한 줄기 가느다란 시냇물처럼 여기에 흘러왔을 따름인 것이다.

 

  여름 햇살이 열음처럼 여물어 쏟아지는 과일밭.

  새까맣게 그을은 구리쇠빛 팔다리로 땀을 적시고 일을 하다가 가을철러 접어들면 몸뚱아리에 살오른 실과들의 내음새를 풍기며 한번쯤 흐물어지게 익을 수는 없는가.

 

  해질 무렵의 석양 하늘 언저리

  수심가같이 스러운 노을이 떨어지고 밤그늘이 덮이면 예저기 하나둘씩 초록별이 솟아나 새초롬한 눈초리로 은근히 속샐기며 어리석음을 흔들어 일깨워준다.

 

  수줍은 달빛일래 조촐하게 물들어 영롱히 자라나는 한그루 향나무의 슬기로움을 그 곁에 깃들여서 배우는 것은 여간 크낙한 기쁨이 아니라서 스스로의 목숨을 곱게 불살라 밝음을 얘기하는 난낱 촛불이 열두폭 병풍 두른 조강한 신혼초야 화촉동방에 시집온 큰애기를 조용히 맞이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며 구름 속에 파묻혀 기러기 한백년을 이냥 살으리로다.

 

                                     1957. ꡔ김관식시선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