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효자 박실(朴實) 이야기

높은바위 2024. 11. 22. 06:11

 

박실(朴實)의 효행에 관해 기록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동각잡기(東閣雜記)"의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아버지 박자안(朴子安)은 태조 때 경상, 전라도의 도안무사(都按撫使)로서 항복한 왜적들의 처리를 한 일이 있다.

그때 왜인에게 군사기밀을 알리는 말을 하였기로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한 소년이 그 경비가 삼엄한 구중궁궐을, 애걸, 매수, 월색(越穡), 야행(夜行) 등 갖은 수단을 감행하여 태조의 대전 앞까지 잠행하였던 것이다.

대뜸 통곡을 하니, 태조가 나와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땅에 뒹굴며 아버지의 구명을 애걸하였다.

 

태조는 이 궁궐을 뚫고 들어올 수 있었던 그 소년의 효행에 압도되어 버렸다.

태조는 한시바삐 구명사절을 보냈다.

 

교서가 당도하던 날에, 관에서 자안(朴子安)의 형을 집행하려고, 얼굴에 칠을 하고, 옷을 벗겨 칼을 차려 놓았는데,

우연히 벌판을 바라보니, 한 사람이 달려오면서 갓을 휘두르므로,

관원이 이상하게 여겨 형집행을 멈추고 기다렸기로 구명이 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본래 학술이나 무예에 뛰어나지 않았으나, 참형(斬刑)을 당하게 된 아버지를 구명한 박실(朴實)은, 금려(禁旅=近衛兵 : 예전에궁궐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하며 경비하는 군대를 이르던 고려와 조선 시대에 주로 기마병으로 조직되었다.)로서 특채되었고, 보은충(報恩忠)을 극진히 하였기로 당상관까지 올랐던 것이다.

박실이 죽자 세종은 2일간 철시를 명하고 치제(致祭)하였다. 

근대인물로는 항일지사 박열(朴烈:1902년 3월 12일 ~ 1974년 1월 17일)이 그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