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는 죽은 사람의 살을 먹고
豬吃死人肉(저흘사인육) : 돼지는 죽은 사람의 살을 먹고
人吃死豬腸(인흘사저장) : 사람은 죽은 돼지 창자를 먹네.
豬不嫌人臭(저불혐인취) : 돼지는 사람 냄새 꺼리지 않고
人反道豬香(인반도저향) : 사람은 돼지 냄새 구수하다 하네.
豬死抛水內(저사포수내) : 돼지가 죽으면 물에 던져버리고
人死掘土藏(인사굴토장) : 사람이 죽으면 흙 속에 파묻는다.
彼此莫相啖(피차막상담) : 사람과 돼지가 서로 먹지 않으면
蓮花生沸湯(연화생비탕) : 끓는 물속에서라도 연꽃이 피어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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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과 인과와 육도윤회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욕심을 말하면서 사람 아닌 돼지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돼지는 이야기 속에서와 달리 자기 배가 부르면 더 먹지 않는다.
동물 중에 오직 사람만이 탐식을 하고 남식을 하고 폭식을 한다.
그것을 인성(人性) 안에 감춰진 수성(獸性)이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짐승은 사람이 하는 것을 따라 할 수 없지만
사람은 때때로 짐승도 하지 않는 일을 저지르고,
우리는 그럴 때 짐승의 이름을 빌어 인간으로서의 절망을 뱉어내는 것이다.
지나침과 모자람을 사이에 두고도 사람들은 그 경계의 끝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모자람의 극에 서서 지나침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곳은 이미 모자람이 아니라는 걸
그런 것을 꿈꾸고 바라는 것이 지나침의 시작이라는 걸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지족(知足)은 모자람에서 멈춰 서는 것이다.
한 숟가락을 미리 덜어내고, 밥을 먹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마음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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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자(寒山子, )는 중국 당나라 7~8세기 때의 은둔 시인이라는 것 외에는 생몰년이나 전기적 사실이 불확실하다.
아마 이름도 필명일 가능성이 크다.
은사라는 말이 가장 먼저 서적에 출현한 것은 아마도 『장자(莊子)』 선성편(繕性篇)일 것이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덕이 감춰진다는 것은 스스로 도를 숨긴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즉 마음은 숨었으되 몸은 숨기지 않았다는 뜻이며, 따라서 단지 산속에 숨어 사는 사람이어야 꼭 은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도덕이 무너진 세상에서 자신이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없게 되자, 덕을 감추어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다.
한산자의 위 시는 인간의 편에서 인간됨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탁한 연못에서 피어나는 연꽃이 아닌, 끓는 물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통해 촌철살인으로 전해준다.
생각해 보라.
끓는 물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다니.
저렇게 단번에 약육강식을 끊어내다니, 신기·절묘라는 말은 이런 문장을 두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돼지가 분간이 되지 않을 때, 내 살을 돼지가 먹고 내가 돼지 창자를 구워 먹을 때, 서로가 서로를 석쇠에 올려놓고 지글지글 구수한 죽음의 연기를 피워놓고 있을 때, 저녁 늦게 돌아와 옷에 밴 연기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굴욕으로 뜨뜻한 얼굴에서 서러운 연꽃이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