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낙빈왕(駱賓王)

높은바위 2023. 11. 8. 07:24

 

역수 강의 송별 : 易水送別(역수송별)

 

此地別燕丹(차지별연단) 이곳에서 연(燕) 나라 태자 단(丹)과 이별할 때

壯士髪衝冠(장사발충관)  장사(壯士)의 머리칼은 관을 뚫었지.

昔時人已沒(석시인이몰)  그 옛날의 사람은 이미 가고 없지만

今日水猶寒(금일수유한) 오늘의 이 강물은 여전히 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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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水(역수) : 허베이 성(河北省) 역현(易縣)에서 흐르는 강.

此地別燕丹(차지별연단) : 燕丹(연단)은 연나라의 태자 단(太子丹)을 말하며, 형가(荊軻)가 진(秦) 나라 왕 정(政: 후일 진시황제)을 살해하러 진으로 떠나는 날 태자 단이 역수에서 형가를 송별하였으며, 고점리(高漸離)는 축을 타고 형가(荊軻)는 “風蕭蕭兮易水寒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 壮士一去兮不復還 (장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노래를 불렀다. <사마천 사기, 자객열전 중 형가>

壯士(장사) : 형가(荊軻)를 말한다.

髪衝冠(발충관) : 머리털이 곤두 서 관을 뚫었다. 비분강개(悲憤慷慨)의 마음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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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전당시(全唐詩) 및 천가시(千家詩)에 실려 있는 낙빈왕의 역수송별 시로 전당시에는 어역수송인(於易水送人)으로 되어 있고, 천가시에는 역수송별(易水送別)의 제목으로 실려 있다.

당시 낙빈왕(駱賓王)이 당나라 정권을 탈취한 측천무후(則天武后)에 대한 분노를 진시황제를 죽이려 했던, 형가의 고사를 인용하여 쓴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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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빈왕(駱賓王, Lo Pin-wang, 성인 이름 광광(觀光/观光) 619–684?)은 중국 당(唐) 초기의 시인(詩人)으로 '초당사걸(初唐四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무주(婺州)의 이우(義烏) 출신으로 성품은 호방하고 거만하면서도 강직하여, 일찍부터 으레 도박꾼들과도 놀곤 하였다고 한다.

 

고종(高宗) 말년에 장안주부(長安主簿)가 되었는데, 당시 고종의 황후로 실권을 휘두르던 측천무후를 공격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가 절강의 임해승(臨海丞)으로 좌천되자, 출세에 뜻을 잃고 관직을 떠나버렸다.

 

그러던 684년 이경업(李敬業)이 측천무후 타도를 외치며 거병하자, 그의 부속(府属)으로서 이경업의 거병을 옹호하고, 동시에 측천무후를 공격하며, 그 죄를 천하에 전하여 알린다는 취지의 격문(檄文)을 기초하였는데, 측천무후는 이 격문을 읽던 중 "(무덤을 덮은) 한 줌 흙도 마르지 않았는데 여섯 자밖에 안 되는 고아는 어디에 의지할 것이냐」(一抔土未乾, 六尺孤安在)라는 구절에서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격문을 지은 자의 이름을 물었고, 낙빈왕의 이름을 듣자 「이런 인재를 불우하게 내버려 두었으니 이는 재상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경업의 거병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낙빈왕은 도망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잡혀 죽었다는 설도 있다).

전당(錢塘)의 영은사(靈隱寺)에 숨어 살았다는 전설도 있는데, 절을 소재로 한 시도 전해지고 있다.

 

낙빈왕은 이미 일곱 살 때부터 시 짓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자라서는 오언율시(五言律詩)의 묘리를 터득하였다고 한다.

그가 지은 「제경편(帝京篇)」은 고금을 통틀어 절창(絶唱)으로 평가된다.

으레 몇 자의 글자만 가지고 대구(對句)를 지어 「산박사(算博士)」라는 속칭도 있었다.

 

낙빈왕의 글을 몹시 아꼈던 측천무후는 조(詔)를 내려서 그의 문장 수백 편을 모아, 교운경(郄雲卿)에게 명하여 편찬할 것을 명했는데, 이것이 《낙빈집(駱丞集)》(전 4권이라고도 하고 10권이라고도 한다)으로 송(頌) ・ 부(賦) ・ 오칠언고(五七言古) ・ 오율(五律) ・ 배율(排律) ・ 절구(絶句) ・ 칠언절구(七言絶句) ・ 계(啓) ・ 서(書) ・ 서(叙) ・ 잡저(雑著)의 총 11항목으로 분류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