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독일

프리드리히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높은바위 2023. 11. 29. 07:44

 

반평생

 

노란 배들 영글어 있고
야생의 장미꽃들 만발한 땅이
호수 속에 깃든다.
그대들 사랑스러운 백조들이여 서로의 입맞춤에 취해
맑게 깨어 있는 거룩한 물속에
머리를 적시는가.

아, 겨울이 오면 나는 어디에서
꽃을 얻어야 하나? 또 어디에서
태양의 빛살과
대지의 그림자를 가져야 하나?
싸늘히 식은 성벽
말없이 서 있고, 바람에 부딪혀
풍향계만 녹슨 소리 울려댄다.

 

* * * * * * * * * * * * * * *

 

프리드리히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1770년 3월 20일 ~ 1843년 7월 6일)은 독일의 시인이다.

생전에는 괴테와 실러의 그늘에 가려져 인정받지 못했으며, 반평생을 가난과 정신 착란에 시달리며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그의 시들이 발굴되며 헤르만 헤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발터 베야민, 모리스 블랑쇼를 위시한 후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오늘날에는 독일 시문학의 정점이자 현대시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770년 슈바벤 지방 네카 강변의 작은 마을 라우펜에서 수도원을 담당했던 관리 하인리히 횔덜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뉘르팅겐 시의 시장과 재혼하며, 뉘르팅겐에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779년 독감으로 인한 폐렴으로 새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어머니는 절망과 비탄에 몸부림쳤고, 그걸 지켜보던 어린
 
횔덜린은 "나의 어머니가 그 짐을 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라고 신께 기도할 만큼 불안과 슬픔의 시기가 찾아왔다.
 
다행히도 두 명의 남편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만큼의 유산을 남겼으며, 이 덕분에 부족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으나, 횔덜린은 이때부터 자주 비감에 젖는 자신의 성격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훗날 밝혔다.
 


1788년, 수도원 학교를 졸업하고 개신교 기숙사 장학생으로 튀빙겐 신학교에 진학했다.
 
그가 성직자가 되길 원하던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헤겔, 셸링 등과 교류하며 임마누엘 칸트의 비판철학과 고대 그리스 고전에 심취했다.
 
이 무렵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을 지켜보며 혁명의 이상에 고취되기도 했지만, 급진파인 자코뱅파의 공포 정치에는 반대한다.
 
석사학위를 따낸 후에는 성직자의 길을 걷는 대신 독일 각지를 떠돌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1793년, 횔덜린은 당시 유명한 작가였던 프리드리히 실러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이를 계기로 이후 실러는 횔덜린에게 가정교사직을 소개해주고, 자신의 간행물에 그의 작품들을 실어주는 등 여러 방면으로 횔덜린을 지원해 줬다.
 
또한 횔덜린은 실러를 통해 괴테, 피히테, 노발리스와 같은 대문호들과 만나 영향을 받으면서, 그의 문학적 소양을 더 성숙시키는데 매진했다.
 
이때 그의 유일한 소설인 『휘페리온』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1795년,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는데, 하필 그곳 안주인 주제테 공타르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주제테는 온화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인물이었는데, 그녀는 그녀와 닮은 면이 많은 횔덜린의 심성에 끌려 그와 교제를 나누게 된 것이다.
 
횔덜린은 그녀를 '디오티마'라 부르고,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는 등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들의 밀회는 발각되었고, 횔덜린은 곧 가정교사직에서 쫓겨났다.
 
이때부터 횔덜린은 가난과 이별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면서, 정신착란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창작욕은 불타올라 수많은 작품을 한순간에 써나갔다.
 
1800년에서 1802년까지 2년이라는 짧은 시기에, 신이 축복이라도 내린 듯 그의 대표작들이 쏟아졌으며, 이 시기를 횔덜린 문학의 절정기라 부른다.
 


1802년, 주제테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정신착란 증세는 더욱 심각해졌다.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요양을 했지만, 상태는 잠시 나아지는 듯싶다가도 증세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는 와중에서도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주제테의 죽음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송시들을 쓰고 그리스 비극들을 완역해서 출판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럼에도 정신착란 때문에 정상적인 일을 하지 못해 먹고살기가 힘들어지자, 이 무렵 친구가 된 이자크 폰 싱클레어가 그에게 도서관 사서직을 마련해 주며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1805년, 그러던 싱클레어마저 반체제활동을 했다는 무고를 당하며 구속되었고, 심지어 횔덜린 역시 공모자로 조사받게 되었다.
 
그리고 횔덜린은 조사받는 도중에 정신착란 증세를 들켜서, 튀빙겐의 정신병원에 강제로 이송되었다.
 
이때의 이송 광경을 보고 귀족부인 카로리네는 자신의 딸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 불쌍한 횔덜린이 오늘 아침 그의 가족에게 돌려보내려고 이송되었단다.
그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그를 책임진 사람들이 그를 안으로 밀어 넣었어.
횔덜린은 소리 내어 외치고 무장된 사람들이 그를 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맞서 싸웠고, 엄청나게 긴 그의 손톱으로 그 사람을 할퀴어서 그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단다."
 
 
 
8개월 만에 퇴원이 결정 났지만 횔덜린은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때 그의 소설 『휘페리온』을 감명 깊게 읽은, 목수 에른스트 치머가 "그렇게 아름답고 찬란한 영혼이 파멸해야 한다는 것을 몹시 애석해" 하면서 후견인을 자처하고는 횔덜린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치머 집안의 친절한 보살핌 덕에 횔덜린은 의사로부터 3년을 못 넘길 것이라는 진단과는 달리 36년이라는 세월을 더 보낸다. 
 
 
그리고 1843년 6월 7일 밤 11시, 횔덜린은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6월 10일 튀빙겐 공동묘지에서 거행되었으며, 백여 명의 신학교 학생들이 장례 행렬을 뒤따랐다.
 
그의 의붓동생 카를이 세운 묘비에는, 그의 시 《운명》의 마지막 연 첫 4행이 새겨져 있다.
 
 
"폭풍 중 가장 성스러운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 벽 무너져 내리기를,
또한 내 영혼 한층 찬란하게
그리고 한층 자유롭게 미지의 세계로 물결쳐 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