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김시민 장군처럼 시호가 충무(忠武)인 정충신(鄭忠信) 장군 이야기이다.
조선 인조 때의 뛰어난 무장인 정충신의 출생담이나 임진왜란 때의 활약의 내용들이 ≪계서야담≫, ≪청구야담≫, ≪동야휘집≫, ≪해동야서(海東野書)≫ 등의 문헌에 실려 전한다.
정충신(鄭忠信, 1576년 ~ 1636년 6월 6일(음력 5월 4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최초의 수군제독 고려의 명장 정지(鄭地)의 9대 손으로, 아버지는 전라도 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종사랑 정 9품계에 해당하는 수령 보좌직) 금천군(錦川君) 정윤(鄭綸)이며, 어머니는 전라도 나주의 노비 출신인 영천 이 씨(永川李氏)로 이인조(李仁祚)의 천출 소생 딸이다.
조선시대 노비의 신분 세습은 '일천즉천(一賤則賤)'으로 부모 중 한 명이 천인(賤人)인 경우, 자녀는 노비로 귀속되고 있어서 이들의 면천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종군했고 적진을 뚫고 임금의 행재소(行在所) 의주까지 연락 갔던 때는 그의 나이 겨우 열일곱 살이었다.
그 충정을 인상 깊게 본 이항복(李恒福)이 그를 문하에 두고, 아들처럼 기르면서, 그에게 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조선 선조 임금은 정충신을 노비에서 면천을 시켜주었다.
정충신은 이항복의 집에 머물면서 학업을 익혔고, 그해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이괄의 속셈을 다음과 같이 갈파하여 작전을 세우도록 상주(上奏)하였었다.
첫째, 당시 서북해안에 기세를 펴고 있던 명나라의 유장(遺將)들과 손을 잡고 남하를 한다.
둘째, 북변의 여진족들과 손을 잡고 남하를 한다.
셋째, 이 외세와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너무 시간이 걸리면 단독 남하한다는 세 약책이 그것이었다.
그는 이괄난 정벌의 도원수인 장만(張晩) 장군의 전부(前部) 대장으로 일선의 총지휘관으로 출정, 길마재(현재 서울 안산) 전투에서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난적을 퇴치하고는 변방의 장신(將臣)으로 난적을 현지에서 못 막은 죄를 사죄한다면서 녹공(錄功)을 거부하고 변방에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인조가 특명으로 불러올려 일등공신으로 책훈(策薰)하고, 한국공신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명칭이 나열된 <竭誠奮威出氣効力振武功臣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이란 공신호를 내렸던 것이다.
"만약 그에게 칼대신 책을 주었더라면 일세의 고현(高賢)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이괄의 난 때 황주,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겼고, 정묘호란 때 부원수가 되고,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하여 유배되었다.
광해군 시절부터 그가 없으면 국방 업무가 중단될 정도로 유능했으며 인조 시절에는 그를 조금만 더 중용했더라면 아쉬움을 표하던 인조에 대한 사관들의 평가가 있다.
생애동안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천출이라는 이유로 관리들이 이괄의 난을 계속 거론하며 정충신을 한직으로 보내버렸고, 더 크게 중용할 수 없는 계기가 된 것이라 하며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 요양하였다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1633년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하여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하여 당진에 유배되고, 후에 장연에 이배 된 뒤 풀려났다.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3월 그가 우려한 것과 같이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주전론이 득세하여 청과 단교하는 사신을 보냈고 후일 병자호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636년 병이 심해지자, 왕이 의관에게 명하여 치료에 진력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1636년 5월 사망하였다.
그는 무술에 뛰어났으며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해박하고,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광주의 경렬사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공(忠武公), 군호는 금남군(錦南君)이며, 광주광역시의 옛 전남도청 앞에서 유동 4거리 가는 길인 금남로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문집에 《만운집》, 저서에 스승 이항복의 유배일지를 기록한《백사북천일록》, 《금남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