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왕유(王維)

높은바위 2015. 6. 12. 08:53

 

 

                 송별(送別)

 

山中相送罷(산중상송파)               산 속에서 배웅을 끝내고,

日暮掩柴扉(일모엄시비)               저녁 어스름에 사립을 닫는다.

春草明年綠(춘초명년녹)               봄풀은 내년에도 푸르겠지만,

王孫歸不歸(왕손귀부귀)               왕손(王孫)은 돌아올까, 아니올까?

 

 

 

* 왕유(王維 : 699-759, 701-761)는 그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각기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699년에 태어나 759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당서(新唐書)>에는 701년에 태어나 761년에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자가 마힐(摩詰)이며, 태원(太原) 기(祁 = 현 산서성(山西省) 기현(祁縣)) 사람이다.

왕유는 비록 사대부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어려서부터 불교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유마힐(維摩詰)은 불경 속의 유명한 거사로 이름 유(維)와 자 마힐(摩詰)을 합하면 바로 거사의 이름이 된다.

이후 더욱 불교 신앙이 경건해져 자연히 선시(禪詩)가 많아졌다.

 

개원 9년(721)에 진사가 되어 감찰어사(監察御使), 좌보궐(左補闕), 문부랑중(文部郞中) 등을 역임했고, 안록산의 난 이후 벼슬을 버리고 산야에 묻혀 불교에 귀의했다.

음악과 회화에도 능해 그림 같은 시를 쓰고 시 같은 그림을 그렸으며, 현재 약 400여 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시는 <왕우승집(王右丞集)>으로 전해진다.

 

왕유는 한마디로 자연시인(自然詩人)이었다.

도연명(陶淵明)의 전원(田園)과 사령운(謝靈運)의 산수(山水)와의 장점을 합친 것으로 중국의 자연은 그에 이르러 처음으로 새로운 입김-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당(唐)나라 사람의 다이내믹한 입김을 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