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내 슬픔 다스리고
홀로 나는 내 슬픔을 다스리고,
홀로 나는 버림받은 5월을 정복하고,
고요한 시절의 들판에,
홀로 나는 향기를 가득 내뿜고
…
칼에 찔린 상처는 아픔의 외침보다 깊지 않겠고
불의는 피보다 경건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했다.
…
나는 홀로 평원에 남고
폭풍을 맞아 홀로 잡혀 성으로 끌려가니
부르짖던 말을 나는 홀로 간직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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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세아스 엘리티스(Odysseas Elytis, 1911년 11월 2일 ~ 1996년 3월 18일)는 현대 그리스의 시인으로, 그리스의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레스보스 출신의 오래된 올리브유 산업 가문인 알레푸델리스의 후손으로, 엘리티스는 1911년 11월 2일 크레타 섬의 헤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나중에 아테네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시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후에 아테네대학의 법대에서 감사로 수업을 들었다.
1935년, 엘리티스는 조지 세페리스와 같은 친구들의 권유로 그의 첫 시를 New Letters 저널에 발표했다.
그의 독특한 흙빛과 독창적인 형태의 진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스 시의 새로운 시대와 그 이후의 개혁의 시작을 도왔다.
1969년부터 1972년까지, 1967-1974년의 그리스 군사정권 하에서, 엘리티스는 파리로 망명했다.
그는 후에 전설적인 어린이 라디오 방송 "Here Lilliput Land"를 제작하고 사회를 맡은 작사가이자 음악학자 마리안니나 크리지와 연애 관계에 있었다.
엘리티스는 매우 사적이고 시적 진실과 경험에 대한 그의 이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 매우 고독했다.
1937년에 그는 군복무를 했다.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그는 코르푸에 있는 국립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전쟁 중에 그는 소위로 임명되었고, 처음에는 제1군단 사령부에 배치되었다가 전장의 최전선에 있는 제24연대로 옮겨졌다.
엘리티스는 문학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후 시와 에세이를 산발적으로 출판했다.
그는 그리스 미술 비평가 협회, AICA-Hellas, 국제 미술 비평가 협회의 회원이었다.
1948-1952년과 1969-1972년에 그는 파리에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소르본느에서 언어학 및 문학 세미나를 감사했고, 테리아드의 가장 존경받는 친구로서 세계의 아방가르드 개척자들(레베르디, 브레통, 차라, 운가레티, 마티스, 피카소, 프랑수아즈 길로, 샤갈, 지아코메티)에게 호평을 받았다.
테리아드는 당대의 모든 유명한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코스타스 액셀로스, 장 폴 사르트르, 프랑수아즈 질로, 르네)과 함께 작품을 출판하면서 동시에 파리에 있었다.
엘리티스와 테리아드는 1939년 엘리티스의 첫 시집 "오리엔테이션"을 출간하면서 돈독한 우정을 쌓았다.
엘리티스와 테리아드 둘 다 레스보스에서 왔고, 그리스 화가 테오필로스를 사랑했다.
파리를 출발해 스위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을 여행했다.
1948년 제네바 국제회의, 1949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예술비평가연맹 창립대회, 1962년 로마의 실크로 로마노 델라 컬투라에서 그리스 대표로 참가했다.
1961년 국무부의 초청으로 미국을 거쳐 1963년 소련과 1965년 불가리아를 거쳐갔다.
오디세아스 엘리티스는 1996년 3월 18일 84세의 나이로 아테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해외여행 계획을 완료하고 있었다.
그의 유족은 그의 조카 미르센과 그의 형 에반젤로스가 아테네 제1묘지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국가를 대표하여 아테네 시장으로부터 조문 영장을 받았다.
그는 197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