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이탈리아

에우제니오 몬탈레(Eugenio Montale)

높은바위 2023. 1. 31. 09:19

 

                   오수(午睡)

 

뜨겁게 달아오른 정원의 담벼락에 바싹 대고

파리한 얼굴로 오수에 빠진다.

가시덤불 사이로 검정새들이 똑똑 쪼는 소리

그리고 뱀들이 스치는 소리를 듣는다.

 

갈라진 땅의 틈새로, 혹은 풀잎 위로

나지막한 흙더미 위로

쉴 새 없이 무너지다 엇갈리는

빨간 개미들의 행렬을 본다.

 

벌거벗은 꼭대기에 매미들이

찢어질 듯 우는 동안

하느적이는 나뭇잎 사이사이로

바다 물결이 멀리서 헐떡이고 있다.

 

눈부신 햇살 속에 방황하는

우리의 삶과 괴로움이여,

그대는 꼭대기에 병조각들이 박힌

담장을 따라가는 것과 어찌 그리도 똑같은가,

서럽고, 놀란 마음으로 느껴 본다.

 

* * * * * * * * * * * * * * * * 

 

* 에우제니오 몬탈레(Eugenio Montale,1896년 10월 12일 ~ 1981년 9월 12일)

주세페 운가레티, 콰시모도와 함께 이탈리아의 현대 3대 시인이라고 불린다. 

그는 제노바에서 태어나 처음엔 음악가가 되는 수업을 받았으나 22세에 문학잡지 <프리모템포> 지의 편집을 시작하면서 문학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현대적 구조, 자유스러운 리듬, 그리고 혁신적 언어의 조화와 융합을 위한 운동의 하나인 에르메티즘(Ermetism)의 주역이 되어 파시즘의 언론과 표현에 대한 자유의 제한에 저항했다.

전통적 시형을 깨뜨리고 황폐한 현대세계의 내적 풍경을 복잡한 새 기법으로 정착시켰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현대세계의 비참함을 읊는 동시에 거기에서 포착된 불멸의 미의 순간을 담았다.

20세기 이탈리아 시단의 주류인 '에르메티즈모(순수시)'로 군림했다.

 

50년이 넘는 저작활동 중에 《기회》(1939년), 《오징어 뼈》(1925년), 《폭풍과 기타》(1956년), 그리고 《71년과 72년의 일기》 등 몇 편을 출판했을 뿐이다.

 

197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