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랑의 전형(典型)
노란 버스를 타고 그 마을을 지났지
깜박할 새 들어섰었지, 깜박할 새 빠져나왔었지
최초의 집, 최후의 집,
그저 그것뿐
난 이름을 잊었던가?
난 도대체 읽기나 읽었던가?
포도밭과 목장(牧場) 사이
헤센 지방의 시골 거리
뉘 초록빛 사립문 앞에 기대 섰었지
그때 뉜 문득 나를 봤었지
지나고 나서 난 돌아다보았지
뉘 아는 체를 했지
뉘라고 불러 실례될까?
미리 용서받을
겨를도 없었지.
난 뉘라고 부르겠다.
난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때 뉘 곁에 가서 섰더라면 하고
뉘도 같은 심정은 아니었는지?
나하고 같은 심정은?
우연에는 분별이 없다.
이를테면 장님이지
느닷없이 우리한테 손을 내밀었다 도로 거둬들였지
꼭 겁 많은 어린애처럼
난 굳게 믿기로 다짐했다.
너야말로 바로 그 사람이었다고
이 환각을 나로부터 뉘 빼앗지 못한다.
이 환각을 뉘 알지 못하니까
뉘 방긋이 웃으면서 초록빛 사립문에 기대섰었지
타우느스 산맥 골짜기였지, 헤센 마을이었지,
마을 이름은 잊었다.
이 사랑은 아직껏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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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히 케스트너(Erich Kästner, 1899년 2월 23일 ~ 1974년 7월 29일)는 1899년 당시 작센 왕국의 수도 드레스덴(Dresden)의 쾨니히스브뤼커 거리(Königsbrücker Str.) 38번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모는 되벨른 출신이었는데 부자인 에밀 친척의 권유로 드레스덴으로 1895년 이사 왔다.
현재 이 거리에는 캐스트너 박물관이 있는데, 그 위치는 후술 될 그의 삼촌 프란츠 아우구스틴(Franz Augustin)의 빌라 1층이다.
아버지 에밀 리하르트 캐스트너(Emil Richard Kästner)는 집안 전통에 따라 가죽 공예 마이스터가 되었는데 당시 산업화의 여파로 직업을 잃고 직공 신세가 되었고, 어머니 이다 아말리아 아우구스틴 캐스트너(Ida Amalia Augustine Kästner)는 푸주술 마이스터 집안이었던 아우구스틴 가문 출신으로 하녀로 일했다가 언니들의 주선으로 에밀 캐스트너를 만나서 결혼했다.
하지만 30대라는 늦은 나이에 미용사가 되었다.
캐스트너 집안은 결코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기에 아파트의 방 세 칸 중 두 칸을 세놓아야 했고, 침실의 1/4는 미용실로 개조해야 했다고 한다.
이다 아밀리아로 말할 것 같으면 자신의 인생에 큰 실망을 하고 아들에게 모든 기대를 쏟아부었는데, 이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였고 안정된 직업인 선생을 하겠다던 아들이 느닷없이 김나지움을 가서 아비투어를 치고 대학으로 가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어도 찬성을 보냈을 정도다.
실제로 캐스트너 자신도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님, 특히 어머니와 친했다고 한다.
어머니 집안인 아우구스틴 집안에 대해서는 작가가 자기 자서전에서 친가인 캐스트너 집안보다 설명을 많이 한다.
이 집안은 대대로 푸주술 마이스터 집안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토끼 판매로 장사 수완을 보여준 프란츠, 파울, 로베르트 세 형제의 경우, 훗날 말(馬) 장사로 아주 크게 성공한다.
그들의 푸줏간은 사람을 고용해 계속 운영된다.
파울 아우구스트는 왕실 말 공급인이라고 형제들 사이 조롱 삼아 불릴 정도였는데, 프란츠 아우구스틴은 반대로 퉁명스럽고 무례하고 거칠고 경박하기 그지없는, 쉽게 말해 마이 페이스적인 사람이었지만 캐스트너는 이 삼촌을 더 좋아했고, 자서전에서도 프란츠 아우구스틴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성공한 이후 자신이 살던 헤흐트 거리에서 안톤 거리 1번지의 널찍한 고급 빌라로 이주했고, 아내(리나 아우구스트), 가정부, 그리고 딸(도라 아우구스트)하고 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 딸의 경우 파울 슈리히 선생과 서로 좋아했지만 프란츠의 거절로 이루지 못했다.
말년의 프란츠 아우구스틴은 자서전의 묘사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으로 큰 손해를 봤지만 다시 돈을 모았고, 결국 "통나무처럼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리나는 그보다 더 오래 살아서 도라의 아들인 프란츠를 돌봤다고 한다.
여담으로 사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생부는 주치의였던 유대인 메디치날라트 에밀 침머만 선생(1864-1953)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디까지나 설이다.
1917년 징병되어 중포병 부대에서 일했으며, 당시 전쟁의 비참함과 군대 생활의 고통은 훗날 그의 반전사상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자서전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나온 작품이라 전후 혹은 군대 생활에 대해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데,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군대 생활을 보면 그렇게 좋은 생활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다.
예를 들어 연병장에서 98식 소총을 들고 무릎굽혀펴기 250번(!)을 했다던가, 아버지가 일하던 군수 공장 근처 탄약고가 폭발해서 아버지가 죽을 뻔했다던가(좀 몸이 그을리긴 했어도 멀쩡했다고 한다).
전후 그는 위에서 언급되었듯, 시 장학금을 받았으며 191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들어갔다.
1925년 프리드리히 1세와 독일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등록금을 충당하기 위해 저널리스트로 일했으며, 또한 노이에 라이프치거 차이퉁(Neue Leipziger Zeitung)에서 비평가로 일하다가 1927년 "경솔한" 시를 실어 해고당했다.
같은 해 베를린으로 이주했지만 베르톨트 뷔르거(Berthold Bürger)라는 가명으로 같은 지에 프리랜서 통신원으로 일했다.
이후 1927년부터 1933년까지는 그의 전성기로 알려진 시기인데, 수많은 시, 신문 칼럼, 기사, 많은 유명 베를린 비평지들에 비평을 남겼다.
현재 약 350건의 기사들이 남아 있는데, 원래는 이보다 더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4년 2월 전쟁 도중 그의 아파트가 불타서 대부분이 유실된 상태다.
그의 첫 번째 책은 1927년 시집인 Herz auf Taille(요부의 심장)이며 33년까지 3권의 시집을 더 냈지만 1928년 어린이용 소설 "에밀과 탐정들(Emil und die Detektive)"로 더 유명하다.
독일에서만 200만 부가 팔리고 5차례나 영화화되었을 정도로 성공했다.
당시 어린이 소설의 트렌드였던 판타지 배경이 아닌 현시대 베를린을 기준으로 묘사한 것과 과도한 도덕적 교훈이 아닌 어린아이들 다운 묘사와 말투를 그대로 소설에 담은 것이 독특한 점이었다.
후속작인 "에밀과 세 쌍둥이(Emil und die Drei Zwillinge, 1933)"와 더불어 현재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추리 소설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당시 유명 작품으로는 <핑크트헨과 안톤>, <하늘을 나는 교실>, <파비앙(Fabian)> 등이 있다.
여담이지만 1932년 작품인 <5월 35일>에서는 핸드폰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벌써 핸드폰이 묘사된다.
주머니 속에서 어디로 연결되었을지 모르는 전화선이 연결된 큼지막한 집전화 수화기가 튀어나오긴 하지만.
이 외에도 '하늘에 연기 형태로 떠오르는 신문', '인간이 필요 없는 100% 전자동 도축기' 등도 묘사된다.
1931년작 <에밀과 탐정들> 영화판은 대성공이었는데, 정작 캐스트너 자신은 불만을 품고 이로 인해 극작가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