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미국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높은바위 2024. 7. 8. 07:47

 

튤립

 

튤립은 너무 흥분을 잘해요, 이곳은 겨울. 

보세요, 모든 것이 순백색이잖아요, 조용하고 또 눈 속에 갇혀 있어요. 

햇살이 이 흰 벽, 이 침대, 이 손에 떨어질 때 

나는 조용히 혼자 누워 평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무명인입니다. 그래서 폭발과는 아무 관계도 없지요. 

나는 내 이름과 내 세탁물을 간호원들에게, 

또 내 병력을 마취사에게, 내 몸은 외과 의사들에게 내주어 버렸답니다. 

 

그들은 내 머리를 베개와 시트 끝동 사이에 받쳐놓았어요 

마치 닫히지 않는 두 개의 흰 눈꺼풀 사이의 눈처럼. 

멍청한 눈동자, 모든 걸 놓치지 않고 봐야만 된다니. 

간호원들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요, 그들이 성가시진 않아요. 

그들은 흰 캡을 쓰고 갈매기가 내륙을 지나가듯 지나가죠. 

저마다 손으로 일을 하면서, 이 간호원이나 저 간호원이나 똑같이, 

그래서 얼마나 많은 간호원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내 몸은 그들에겐 조약돌이죠, 그들은 마치 물이 흘러 넘어가야만 하는 

조약돌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돌보듯 그것을 보살펴 주지요. 

그들은 빛나는 주사 바늘로 나를 마비시키고, 나를 잠재우지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여행가방에는 신물이 났고- 

까만 알약 상자 같은, 검은 에나멜가죽으로 된 간단한 여행가방. 

가족사진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내 남편과 아이. 

그들의 미소가 내 살에 와 박힙니다, 미소 짓는 작은 갈고리들. 

 

나는 모든 것을 풀어놓아 버렸어요, 

고집스럽게 내 이름과 주소에 매달린 서른 살의 화물선. 

그들은 내 사랑스러운 기억들을 깨끗이 닦아 버렸어요. 

초록의 플라스틱 베개가 달린 운반 침대 위에서 알몸으로 겁에 질린 채 

나는 내 찻잔 세트, 내 속옷장, 내 책들이 

시야에서 침몰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물이 내 머리를 뒤덮었지요. 

나는 이제 수녀입니다. 이렇게 순결했던 적은 없었어요. 

 

꽃은 필요 없어요, 그저 

양손을 위로 향하게 하고 누워서 완전히 나를 비워두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자유로운지, 당신은 모르실 걸요. 얼마나 자유로운지- 

그 평화스러움이 너무 커서 멍해질 정도니까요, 

그리고 그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요, 명찰 하나와 자질구레한 장신구 정도면 족해요. 

평화란, 결국은, 죽은 자들이 다가와 에워싸는 것이죠, 난 그들이 

성찬식 밀떡처럼 평화를 입에 넣고 다무는 것을 상상합니다. 

 

튤립은 우선 너무 빨갛죠, 그 꽃들이 나를 아프게 합니다. 

포장지를 통해서도 난 그들이 가볍게 숨 쉬는 걸 들을 수 있답니다. 

지독한 아기처럼, 그들의 하얀 기저귀를 통해서. 

튤립의 빨간색이 내 상처에 말을 겁니다, 그것은 잘 어울려요. 

그들은 교활하죠. 둥둥 떠 있는 듯하지만 나를 내리누르며 

그들의 느닷없는 혀와 색깔로 내 속을 뒤집어 놓아요, 

내 목둘레엔 십여 개의 빨간 납 봉돌. 

 

전엔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주시당하고 있죠. 

튤립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군요, 하루에 한 번은 

햇빛이 천천히 넓어졌다 천천히 가늘어지는 내 등 뒤의 창문도. 

그리고 나는 태양의 눈과 튤립의 눈 사이에 있는 

오히려 종이 그림자 같은, 밋밋하고 우스꽝스러운 나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내 얼굴이 없군요, 난 스스로를 지워 없애고 싶었답니다. 

활기찬 튤립이 내 산소를 내 산소를 먹어치웁니다. 

 

그들이 들어오기 전엔 공기가 무척 고요했지요, 

법석 떨지 않고 살금살금 오가며. 

그런데 튤립이 떠들썩한 소음처음 공기를 꽉 채워버렸어요. 

가라앉아 뻘겋게 녹슨 엔진 주위에 강이 부딪쳐 소용돌이치듯 

이젠 공기가 튤립 주위에 부딪쳐 소용돌이치는군요. 

그들은 얽매이지 않은 채 행복하게 놀고 쉬던 

내 주위를 집중시킵니다. 

 

벽들 또한 따뜻해지는 것 같군요. 

튤립은 위험한 동물처럼 철책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해요, 

그들은 거대한 아프리카 고양이처럼 입을 벌리고 있어요. 

그리고 난 내 심장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것은 나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서 

그 접시 같은 빠알간 봉오리를 열었다 닫았다 합니다. 

내가 맛보는 물은 바닷물처럼 따스하고 짜며, 

건강처럼 머나먼 나라에서 오는군요. 

 

* * * * * * * * * * * * * * *

 

*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필명 : 빅토리아 루카스 ; Victoria Lucas, 1932년 10월 27일 ~ 1963년 2월 11일, 향년 30세)미국의 시인이다.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가였던 아버지 오토 플라스와 어머니 아우렐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늘 자살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죽음은 실비아의 삶과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당대 최고의 시인인 테드 휴즈와 결혼하였지만, 휴즈의 여성편력으로 인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다.

휴즈와 이별한 후, 작품에 몰두하다가 결국 31세 나이로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은 채 자살함으로써 그녀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실비아 플라스는 1932년 10월 27일 미국 보스턴 대학교의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가였던 독일 그라보프(Grabow) 출신

의 아버지 오토 플라스(Otto Plath)와 오스트리아계 미국인인 어머니 아우렐리아 쇼보 플라스(Aurelia Schober Plath)의 딸로 태어났다.

1934년 그녀의 동생 워렌 플라스(Warren Plath)가 태어난 뒤 매사추세츠 윈스럽(Winthrop)에서 자랐다.

실비아 플라스는 8살 때 처음 Boston Herald에 시를 발표하였고, The Scholastic Art & Writing Awards에서 상을 받으면서 뛰어난 문학·예술적 재능으로 주목받았다.



1940년에 아버지가 당뇨 합병증으로 사망했으며, 1942년 보스턴 서쪽 교외의 매사추세츠 웰즐리(Wellesley)로 이사했다.

당시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에게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주었고, 이는 그녀의 삶과 예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플라스는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인 9살 때 첫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1956년 영국 시인 테드 휴즈(Ted Hughes)를 만나게 되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해 6월에 결혼했다.

플라스가 유학 과정을 마친 뒤 두 사람은 미국으로 갔으며, 모교인 스미스 여대에서 1957년 9월부터 이듬해 5월 말까지 강의를 하였다.

남편 휴즈는 인근 매사추세츠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교수 직업이 창작 생활에 부담이 된다 느끼고 보스턴으로 옮겨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플라스는 보스턴에서 생활을 이어나가게 되었고, 이 시기에 보스턴 대학교에서 시인 로버트 로월(RobertLowell)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의 기간은 플라스가 가장 활성하게 시를 썼던 시기이며, 두 자녀도 이때 낳았다.

1960년 영국으로 돌아가, 첫딸 프리다(Frieda)를 출산하였으며, 임신 중 출판계약을 체결하고 1960년 10월 자신의 첫 번째 시집 <거상(The Colossus and other poems)>를 출판한다.

1962년 아들 니콜라스(Nicholas)가 출생하지만, 그 해 7월 휴즈가 애시어 웨빌(Assia Wevill)과 내연의 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실비아와 휴즈는 별거하게 된다.

 

상간녀였던 애시어 웨빌의 최후도 끝이 좋지 못했다.

1969년, 테드 휴스가 제 버릇 개 못 주고 고작 6년 만에 다시 외도를 시작하며 버림받자, 실비아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살한것이다.

심지어 자녀 살해 후 자살.

테드 휴스와 자신 사이에 태어난 알렉산드라 웨빌에게 수면제를 먹인 후, 자신은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니콜라스 휴스도 우울증에 시달리던 끝에 테드 휴스가 사망한 지 11년뒤인 2009년에 집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여, 47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딸 프리다 휴스는 현재까지 작가로 활동하는데, 그녀도 3번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으로 끝났으며 자식이 없다.



아이들을 데리고 런던에 돌아온 플라스는 그해 말까지 잘 알려진 시 <아빠(Daddy)>와 <레이디 라자러스(Lady Lazarus)>등 많은 시를 썼다.

1963년 1월 14일,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소설 <벨 자(The Bell Jar)>는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