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어(詩語)/ㅅ

사랑(3)

높은바위 2024. 6. 2. 07:39

 

소중히 여기어 정성을 다하는 마음. 정에 끌리어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그러한 관계. 사랑에는 모성애, 형제애, 이성애, 종교애, 자기애, 운명애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시에 있어 사랑은 주로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을 바탕으로 지고한 사랑에 대한 정신적 고양을 추구하는 동인이 된다.

한편 사랑은 그 좌절로 인한 외로움과 고통스러움, 물질성, 구속성 등의 내적 갈등을 야기하는 삶의 감옥 또는 업(業)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나는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당신을 사랑해 하며

아양을 떨고,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 버스가 다니는 길과 버스 속의 구린내와

길이 오른쪽으로 굽을 때 너의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훔치는 한 사내의 부도덕에게 사랑의 法(법)을 묻는다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오늘은 소주를 마시고

취하는 법을 소주에게 묻는다 (오규원, '사랑의 기교', "현대문학", 1974.11)

 

꽃 피어도

나비

오지 않는다

 

봄의 적막이

속에 든다

 

춥고

외로와

사랑하고저 하나

내밀어볼

없다

 

온 마음

맨 몸이 죽도록

거리를 걷는다

피투성이로 걷는다

사랑하고저 (김지하, '사랑', "중심의 괴로움", P. 78)

 

업보처럼

쑥쑥 자라는 아이들만 남았다

 

지은 죄 많고

아직도 더 죄지을 듯

불안한 하루하루

눈 앞에 커다랗게

업보처럼 남았다

 

다 놓아버릴 수 없을까

마음만 그저

노을구름처럼 떴다간 스러지고

한 방울 두 방울씩

가슴 밑에 고이는

업보 사랑 (김지하, '업보', "별 밭을 우러르며", P. 54)

 

풀무불에 은을 달구듯이 벼락같이 내린 병이 너를 달구어 주느니 너의 병 한 바지게로 늘여쳐지는 그 무거움, 내 세속의 모서리에 닳은 쬐그만 손바닥으로 덜어줄 수 있을까

사랑이여 덜어줄 수 있을까, 바람은 이냥 풀무질로 머릴 돌려 떼지어 가고 손바닥 닳는 소리로 쑤우쑤우 떼지어 가고 (강희근, '사랑祭제· 6', "사랑祭제 이후", p. 16)

 

가까이 가면 자꾸 떨리는 것,

그래서 조금은 떨어지고 싶은 것,

그렇지만 아주 멀리 달아나지 못하는 것,

주는 것보다 많이 받고 싶지만 억지로는 조금도 빼앗지 못하는 것. (권선옥, '사랑', "풀꽃 사랑", p. 13)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볼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 보며 (김남주, '사랑은', "조국은 하나다", p. 66)

 

밤의 봉우리를 넘고 넘어

부르튼 발이 가까스로 다다른 마을의

잠들지 못하는 호야불 (이가림, '사랑', "순간의 거울", p. 41)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내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이 이승의 짐 중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사랑이로구나

가장 소중한 짐이 사랑이로구나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로구나 (조병화, '34', "타향에 핀 작은 들꽃", p. 76)

 

사랑은 나눠 갖는 것 아니라

살며시 둘이 함께 빚는 것

 

사랑은 거기 있는 것 아니라

살면서 내 님 마음 빚는 것

 

사랑은 주고받는 것 아니라

살면서 둘이 함께 빚는 것. (유경환, '둘이 함께', "겨울 오솔길", p.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