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사랑

높은바위 2015. 11. 18. 08:04

 

참사랑은 무엇일까?

생텍쥐페리(Saint-Exupéry)는 《어린 왕자》에서 ‘사랑은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향연》은 플라톤(Platon)이 남긴 30여 개의 대화편 가운데 하나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대부분 소크라테스(Socrates)가 제자․친구․적대자 등과 어떤 주제를 놓고 벌인 논쟁을 기록한 것이다.

《향연》은 ‘에로스에 관해’ 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을 뜻하기도 하고 사랑을 뜻하기도 한다.

이 대화편은 비극 작가 아가톤이, 연극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축하하러 모인 사람들이, 에로스에 관해 돌아가며 한 마디씩 찬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어 보면 ‘플라토닉 러브’의 참뜻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뭔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대상을 욕구하는 것이고, 욕구한다는 것은 지금 그 대상이 부족하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돈을 사랑하는 것은, 돈을 욕구하는 것이고 이는 지금 나에게 돈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사랑의 중요한 대상 가운데 하나가 지혜다.

그리고 그리스 말은 ‘지혜(sophia)’와 ‘사랑하다(philos)’를 더하면 ‘철학(philosophia)’이 된다.

따라서 플라토닉 러브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며, 따라서 함께 철학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어린 왕자》의 참사랑도 플라토닉 러브의 현대판이다.

여우와 어린 왕자는 처음부터 같은 쪽을 바라볼 수 없으니까, 길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길들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첫날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 매일 조금씩 가까이 앉고, 그 다음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시간 약속까지 하고 오라고 말한다.

플라토닉 러브에서 길들이기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지혜를 얻기 위해 오랫동안 꾸준하고 치열하게 대화하는 과정이다.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습을 바꾸고 조율하는 과정이다.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연인은 오랫동안 만나고, 같이 살고, 티격태격하면서 생각과 행동을 조금씩 맞추어 간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은 플라토닉 러브를 시시하게 여긴다.

왜 그럴까?

플라토닉 러브는 몸보다 마음과 지혜 사랑을 강조함으로서, 섹스가 억압하는 금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는 금기를 어길 때 강렬한 쾌감을 줄 수 있다.

사회가 결혼 이전의 섹스를 금지한다면, 이런 섹스 또는 이런 섹스에 대한 상상이 즐겁고,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관습이라면,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재미있고, 몸과 몸을 접촉하는 섹스가 관행이라면, 훔쳐보거나 혼자서 즐기는 행위가 짜릿하다.

 

플라토닉 러브에서 시작한, 사랑에 대한 관념의 역사는 2,500년을 넘어, 이제 사이버 에로스로까지 변모하고 있다.

온갖 포르노그래피가 사이버 공간을 떠돌아다니고 있으며, 채팅으로 나누는 섹스와 사이버 결혼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현대의 사랑 문화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첫눈에 불꽃이 일어나는 열정적 사랑이나, 영혼의 빈자리를 메우는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사람은 아직 많다.

그러나 열정이나 낭만을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이런 사람은 공통적으로, 사랑에서 어떤 의미를 찾거나, 따지는 일을 귀찮게 여기고,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

과연 사랑은 아무 의미도 따질 수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