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프랑스

비니

높은바위 2015. 1. 22. 15:01

 

비니(Alfred de Vigny : 1797-1863)는 귀족 출신으로 군인으로서 출세하려던 그의 야망이 좌절당하고 나서, 살롱의 권유로 문단에 데뷔하여 조금씩 성공을 하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불행하고 환멸에 찬 인생을 보냈다.

그의 작품으로는 <근고시집(Poémes antiques et modernes)>과 <운명시집(Les destinées)>의 두 권의 시집이 있으며, 산문 및 소설도 많다.

그의 작품에서는, 그의 운명을 지배한 프랑스 혁명에 의해 몰락한 귀족으로서의 울분과, 또 철학적인 사색가로서의 천성을 보여 주며, 지적으로 우위에 있던 인간의 어느 것과도 타협할 수 없는 결벽성을 엿볼 수 있다.

 

 

              늑대의 죽음

 

                                    1 

 

훨훨 타오르는 불길 위로 번져가는 연기처럼

구름이 불덩이 같은 달을 감싸면서 흐르고 있었고,

숲은 아득한 지평선 끝까지 검기만 하였다.

우리는 아무말도 없이, 축축한 풀밭 위로

깊은 숲속 키큰 히이드가 우거진 황야를 걷고 있었다.

그때, 랑드지방의 전나무 숲 속에서

우리가 추적해온 방랑자 늑대의 커다란 발톱자국을 보았다.

숨을 죽이고, 발을 멈춘 채

우리는 들어 보았다.

숲도 들판도 아무런 한숨소리를 허공에 토해 놓지 않고 있었다.

다만,

검은 바람개비만이 창공을 향해 윙윙 소리내고 있었다.

땅 위에서 높이 떠돌고 있는 바람은

여기저기 외롭게 떨어져 있는 망루들만을

겨우 스쳐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망루 밑의 참나무들은, 비스듬한 바위에,

팔꿈치를 고인 채 잠들어 누워 있는 듯 하였다.

아무 소리도 들릴 리가 없었다.

그때, 머리 숙여 살펴보고 있던 사냥꾼들 중에 제일 늙은이가

바싹 몸을 엎드리면서 모래를 내려다보았다.

곧 이어

이런 일에 한 번도 실수한 일 없는 그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 생생한 자국들은

두 마리 큰 늑대와 두 마리 새끼늑대의

힘찬 발톱자국들임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우리 모두는 칼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총과 흰 섬광을 내는 칼을 숨기면서

나뭇가지를 헤치면서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세 명이 우뚝 멈춰 섰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보고 그러는가 하고 두리번대다가,

갑자기 불 뿜는 두 개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로 네 개의 민첩한 형상들이

숲 한가운데에서 달빛을 받으며 너울너울

춤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매일 주인이 돌아올 때마다

큰소리를 지르며 좋아하는 사냥개의 모습 같았다.

그들의 생김새와 춤추는 모습이 사냥개와 흡사했다.

그러나 새끼늑대들은 그들의 적인 사람들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반쯤 잠든 채 누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조용조용히 춤추고 있었다.

아비늑대는 서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서 어미늑대는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털이 잔뜩 난 옆구리로 반신반인 레뮈와 로밀뤼스를 품어 주고 있던

그 옛날의 로마인들이 찬양하던 대리석 암 늑대의 모습 같았다.

아비늑대가 와서 앉았다.

두 발을 똑바로 뻗어 갈퀴모양의 발톱을 모래에 푹 박았다.

기습을 당했으니 도망칠 길은 막혀버렸고,

모든 길이 막혀버렸으니 이제 끝장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때 그는 불타는 입을 벌려

가장 크고 대담한 사냥개의 헐떡이는 목을 꽉 물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쏜 총알이 그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도

우리의 예리한 칼이 집게처럼

그의 넓은 내장을 이리저리 찢어 휘둘러대도

목 물린 개가 그보다 훨씬 먼저 죽어서

그의 발 밑에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강철과 같은 턱을 풀어 놓지 않고 있었다.

그때, 늑대가 개를 풀어버리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허리에 손잡이까지 찔려 박힌 칼들은

피로 흠뻑 물들은 풀밭에 그를 못박은 것 같았다.

우리의 총들이 무시무시하게 그를 빙 둘러쌌다.

우리를 다시 한번 노려보고 나서,  늑대는

입가에 흘러 퍼지는 피를 핥으면서 다시 누웠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죽는가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큰 눈을 감으며, 외마디소리도 지르지 않고서 죽어갔다.

                                    2

나는 화약 없는 총대에 이마를 기대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미늑대와 새끼들을 추적할 결심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 모두 셋은 아비늑대를 기다렸을 것이다.

나의 생각대로라면,

아름답고 슬픈 어미늑대는 두 마리 새끼만 없었다면,

아비늑대 혼자서 그 뼈아픈 시련을 겪도록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어미늑대의 의무는,

새끼들을 구해 배고픔을 참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했고,

잠자리를 얻기 위하여 인간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숲과 바위를 최초에 소유한 늑대들을 몰아내고 있는

비굴한 짐승인 개들과 인간이 함께 맺은

도시의 계략에 결코 빠져들지 않도록 가르쳐야 했다.

                                    3

 

아! 인간이라는 위대한 이름을 우리는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약하며,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생명과 고난을 어떻게 마무리져야 하는가를

고귀한 동물이여, 너만은 아는구나.

땅 위에 살면서 거기에다 우리가 남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때

침묵만이 위대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연약할 뿐이다.

아! 야생의 여행자여, 나는 너를 잘 이해하겠다.

너의 마지막 시선은 나의 심장에까지 와 닿았다.

너의 시선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근면하고 깊이 사색해서

이 드높고 고결한 스토아적인 경지에 이르게 하라.

숲에서 태어난 나는 쉽사리 그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

신음하고, 울고, 기도함은 모두 비겁하다.

운명이 너를 인도해가는 길에서,

힘차게 너의 길고 무거운 삶의 과업을 수행해 가라.

그리고 나서, 나처럼 시련을 견디며 말없이 죽어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