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스페인

공고라

높은바위 2015. 9. 17. 07:26

 

         단시(短詩)

 

소녀는 울고 있었다.

우는 것이 당연하였다.

무정한 님의 모습을 너무 오래 볼 수 없었다.

 

소녀는 너무나 어린 나이에

버림받았다.

버림받을 나이조차 있을 것 같지 않게 버림받았다.

 

배신한 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에

울고 있는 소녀를

달님이 발견하고

햇님이 버리고 갔다.

 

언제나 정염에 정염을 낳게 하고

기억에 기억을 낳게 하고

고통에 고통을 낳게 하면서

소녀를 버리고 갔다.

 

울어라 예쁜 소녀야.

우는 것이 당연하단다.

어머니가 말하였다.

“얘야, 제발 울음을 그쳐 다오.

지레 내가 살지 못하겠다.”

 

소녀는 대답하였다.

“아니, 울음을 그칠 수 없어요.

울게 하는 사연도 하도 많은데

눈은 단지 둘 뿐이에요.

 

어머니, 무분별한 짓으로

어머니의 속을 썩여 드려요.

이 기회에 눈물이

제 울음을 자꾸 재촉합니다.

 

그 허구 많은 세월 중

그 어느 때

활 쏘는 신

사랑의 화살을 쏘았더랬어요.

 

어머니, 전 이제는

노래 안 부를래요,

만약에 노래를 부르면

제 노래는 그만 애가 되고 말 거예요.

 

그이가 가버렸어요.

모든 것을 가지고 가버렸어요.

제게 침묵을 남겨 놓은 채

목소리를 가지고 가버렸어요.”

 

울어라, 예쁜 소녀야,

우는 것이 당연하단다.

 

 

 

​* 공고라(Luis de Góngora y Argote : 1561-1627)는 코르도바 출생으로 살라망카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585년부터 성직에 들어가 코르도바 성당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나 종교와 신앙에는 관심이 없고, 성직자의 신분으로 투우를 구경하고 시를 썼다가 견책되기도 했다.

1599년에는 부제(副祭)가 되었고, <대가집(大歌集)>과 <에스파냐 명류시인 명시집(名流詩人名詩集)> 제1편에 아름다운 시를 많이 발표하였다.

1612년에 마드리드로 거처를 옮겨, 이듬해 국왕 전속 신부가 되었다.

수년 후에 코르도바로 돌아왔으나,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끝내 졸중(卒中)으로 죽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서정시로 스페인의 전통적 형식에 따라 매혹적인 시를 썼다.

작품은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

그 하나는 초기의 작품으로서 <레트리야(Leterillas)>, <로만세(Romances)> 등 에스파냐 고래(古來)의 형식에 따른 것인데,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 <모두가 소곤거리고 있다> 등은 모두 평이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러나 1609년경부터 시풍은 변화하여, 그때까지의 단순하고 매혹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난폭한 언어의 전위(轉位)나 부자연스러운 대구(對句), 과장된 비유와 근거가 불명한 우화의 사용 등을 특색으로 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난해한 시는 이른바 교양 있는 지식층만을 대상으로 한 데에서, 이것을 ‘교양주의(敎養主義)’, 과다한 수식으로 후세 스페인 문학에 악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이같은 과잉된 수식을 중시하는 방식을 그의 이름을 빌어 ‘공고리즘―공고리스모(Góngorismo) ’라고 하게 되었다.

이 종류의 작품에는 <폴리페모와 갈라테아의 우화(Fábula de Polifemo y Galatea)>(1613)와 <고독(Soledades)>(16l3)이 대표작이다.

이 작시법(作詩法)은 L.베이가와 케베이드의 비난을 받아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으나, 후일에 와서는 비난한 사람들도 이 작시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두산백과 참조)

Beethoven - Fur Elise(Andre Wat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