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43.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높은바위 2005. 6. 28. 09:14
 

43.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 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마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 오던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조선일보.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