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25. 琉 璃 窓 1

높은바위 2005. 6. 2. 18:22
 

25. 琉  璃  窓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 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1930.  조선지광



* 이 시는 자식을 잃은 슬픔과 죽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선명한 이미지를 통하여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유리창에 붙어 서서 멀리 밤하늘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별을 바라보고 있다. 그 별은 죽은 아이의 순결한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려서 별을 잘 볼 수가 없어 입김을 불어 그것을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고 한다.’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것 때문에 아이의 영상이 담겨 있는 별을 잘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리창을 열어 젖히지 못하는 이유는 유리창에 어리는 입김에서도, 아이의 영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창에 어리는 입김에 언 날개를 파다거리는 새의 영상이 나타나는데, 그 새는 폐혈관이 찢어진 채 죽은 어린 아이의 혼이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이란 처절하리만치 슬픈 법인데, 이 시에서는 그 감정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슬픈 감정의 노출이 과잉되지 않고 절제되어 드러나는 것은 감정의 대위법에 의해서이다. ‘차고 슬픈 것’, ‘외롭고 항홀한 심사’와 같이 차가운 것과 슬픈 것, 외로운 것과 황홀한 것을 대립시키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절제된 감정은 마지막 행에서 기어이 터져 나오고 만다.)

  이러한 절제된 언어로 시를 형상화하는 능력은 정지용 특유의 것이다. 모더니즘(이미지즘)의 이론적 기수인 김기림이 정지용을 극찬한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선명하고 참신한 이미지의 도입, 감각적이고 세련된 시어의 선택 등이 이미지즘의 특징이다(시각적 이미지와 대위법을 통한 감정의 절제). 특히 ‘외로운 황홀한 심사’와 같은 관형어의 모순 어법(모순 형용,oxymoron)은 독특한 표현 기교이다. 외로운 심사는 죽은 자식을 그리워하는 상황이기에 당연하거니와, 황홀한 심사는 유리창을 닦는 일종의 의식을 통해 죽은 자식을 그 영상으로 만나고 있기 때문에 유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