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22. 국 경 의 밤

높은바위 2005. 6. 2. 06:12
 

22. 국 경 의   밤


          제   1   부


         1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 갔다 ---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곰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놓고

  밤새가며 속태이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붓는 魚油등잔만 바라본다,

  北國의 겨울밤은 깊어가는데.


         2

  어데서 불시에 땅밑으로 울려나오는 듯

  “어 --- 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라도

  촌민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妻女만은 잽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

  눈보래에 늦게 내리는

  營林廠 山村실이 花夫떼 소리언만.


         3

  마즈막 가는 병자의 부르짖음 같은

  애처러운 바람소리에 싸이어

  어데서 “땅”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여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이 났다고 실색하야 숨죽일 때

  이 妻女만은 강도 채 못 건넌 채 얻어맞는 사내 일이라고

  문비탈을 쓸어안고 흑흑 느껴가며 운다 ---

  겨울에도 한三冬,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짱 끊는 소리언만,


         4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이

  저리 강건너

  對岸 벌에서는 순경들의 파수막에서

  玉漆짱 태우는 빠알간 불빛이 보인다.

  까아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李太白을 부르면서,


         5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 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갑박거리고

  눈보래 심한 강벌에는

  외아지 白楊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안고 춤을 춘다,

  아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妻女의 마음을 핫! 핫! 놀래놓으면서 ---


         6

  전선이 운다, 잉 -- 잉 -- 하고

  國交하러 가는 전신줄이 몹시도 운다,

  집도 白楊도 山谷도 오양간 당나귀도 따라서 운다,

  이렇게 춥길래

  오늘따라 間島 이사꾼도 별로 없지

  얼음짱 깔린 강바닥을

  바가지 달아매고 건너는

  밤마다 밤마다 외로이 건너는

  함경도 이사꾼도 별로 안 보이지,

  會寧서는 벌써 마즈막 車고동이 텄는데,


         7

  봄이 와도 꽃 한 폭 필 줄 모르는

  강건너 山川으로서는

  바람에 눈보래가 쓸려서

  강 한판에

  秦始王陵 같은 무덤을 쌓아놓고는

  이내 雁鴨池를 파고 달아난다,

  하늘 따 모다 晦暝한 속에 백금 같은 달빛만이

  白雪로 오백리, 月光으로 三千里,

  두만강의 겨울밤은 춥고도 고요하더라.

 

                1924. 시집 ꡔ국경의 밤ꡕ



* 이 시는 1910년대 후반 이후 서정시로만 일관하여 온 우리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최초로 나타난 서사시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남편을 기다림 - 남편의 죽어서 돌아옴’ - 이라는 현실적인 비극을 바탕으로 하여, 그 속에 ‘옛 사랑의 비극 - 옛 애인과의 재회와 갈등’ 이라는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실적인 비극으로서의 남편의 죽음을 외화로 하고, 그 안에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비극과 그 갈등을 내화로서 담고 있는 비극의 중층 구조로 짜여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청춘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낭만적으로 묘파한 작품으로 이해되기 쉽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작품의 비극성이 사랑의 비극 그 자체에서 파생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치하 국경 지방의 변두리 계층의 불안한 현실과 소외된 삶에 연유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국경의 밤」에는 작가의 예리한 현실 인식과 강렬한 민족 의식이 상징화 되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