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8일
금천, 미아리 방면에서
서울 진입을 막고 있던 장병들과 군수장비의
퇴로는 어떻게 하라고
서둘러 한강교를 폭파해야 했을까.
서울 중심까지 인민군이 진입하기에는
아직10시간이나 더 있어야 했는데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피난길에 나선 시민과
차의 행렬이 늘어선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이로 인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된 시민의 수는
수백 명에 달했으니
누가 이들의 죽음을 거두었을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이정표는 동강난 다리 아래로 떨어져
강물에 흘러갔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은 혼란뿐이었다.
강변을 끼고 나룻배에 목숨을 건
피난민의 아우성, 차라리 강물은
흐르지 않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