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172. 생명의 서·1장

높은바위 2005. 8. 13. 00:53
 

172. 생명의 서·1장

 

                                           유 치 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동아일보> 1938.10.19.

1.나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2.이 시는 어떤 상황을 노래한 것인지 상상하여 한편의 이야기로 꾸며 봅시다.

  삶은 끊임없는 싸움의 과정이다. 따라서 승부에서 졌을 때, 인간은 죽음에 대한 동경과 허무감에 휩싸인다. 그것은 삶의 포기이다. 참다운 삶은 허무감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이 시는 의지로써 외로움과 삶의 허무를 극복하려고 한다. 사막과 인간의 대결을 통해서 그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3.이 시는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남성적, 독백적인 어조로 관념적 진술을 하고 있는 이 시는 우선 ‘열사의 끝’, ‘아라비아 사막’이라는 사멸과 허적의 터전 위에서 오히려 자신의 생을 붙잡고 그것과 진지하게 대결하려는 3연의 구조로 되어 있다.

  첫째연에서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제시된다. ‘병든 나무’로 표현된 내가 사는 현실은 애증으로 생명이 부대끼는 어려운 현실이다. 자신의 지식이나 현실적 생활만으로는 생존의 의미나 생명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음을 느낀다. 둘째연에서는 사막을 극한 상황으로 설정하고 구체화하고 있다. 이 사막은 일상적 자아가 본래적 자아를 찾기 위해 선택된 공간이다. 즉, 사막은 일상적 자아를 본래적 자아로 바꾸어 주는 매개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열사의 끝’이고 허무의 공간인 사막에서 신(神)도 고민한다. 사막은 해, 바람, 어둠과 모래로 인해 모든 존재가 소멸하고 잉태(생성)하는 원초적 공간이다. 서정적 자아가 그곳에서 본질적인 생명의 모습을 찾으려는 것도 사실은 이런 사막의 속성을 파악한 것이다. 셋째연에는 사막과의 대결을 통해서 본래적 자아를 찾으려는 서정적 자아의 굳센 의지가 나타나고 있다. 그 대결은 고독하고 치열한, 운명과 같은 것이다.  자기 학대를 통해서 원초적 공간인 사막에서 화자는 일상적인 모습을 버리고 본질적인 모습을 찾는 것이다.  만약 본질적인 모습을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비장한 결의는 ‘백골’이라는강렬하고 절대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 시로 인해 유치환을 생명파라고 규정하는 이유를 우리는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표현면에서 보면 이 시는 의지적·남성적·사변적(思辨的) 문체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여러 한자어의 사용, 강한 어감을 지닌 어휘 등의 사용이 이 시의 중요한 문체적 특징을 이룬다.

 

4.구성

   극한 상황의 설정, 괴로운 현실로부터의 초극을 모색(1연)

   극한 상황의 구체화 (2연)

   시적 자아의 결의, 본연의 자아에 대한 추구(3연)


5.이 시의 핵심적 요소는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생명의 의미이다. 여기서 생명이란 육체적·물리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생명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란 의식이 없는 삶이며, 원시의 모습이란 의식이 마음껏 발휘된 고도의 정신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가장 비생명적인 곳에 대치된  생명의 본질, 그것을 통해 이 시는 생명파시로서의 시성(詩性)을 획득하는 것이다.  

6.주제

  생명의 본질 추구


7.지은이 소개

8.생각해 봅시다.

(1) 시에 나타난 ‘나’의 의미를 말해보자.

   여기서 나는 일상적인 자아와 본질적인 자아로 나뉜다. 즉, 일상적인 ‘나’는 사막에 가서 본질적인 ‘나’로 바뀌게 된다. 1연의 ‘나’와 3연 6행의 ‘나’는 일상적인 자아이고,  그외 3연에 나타난 ‘나’는 모두 ‘원시의 본연한 자태’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자아이다.

(2) 3연 마지막 행의 의미를 역설과 관련지어 생각해보자.

  *순수 본연의 자아를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의 세계를 택하겠다는 것으로, 자아의 재생을 기도하는 역설적 표현이다.

9.이 시는 어떤 작품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까요.

  두 명의 자아, 즉 현상적 자아와 본질적 자아가 등장한다는 면에서 이상의 「거울」과, 현실 초극을 위한 의지의 시라는 면에서  그의 「일월」, 이육사의 「절정」 등과 깊이 관련된다. 한편, 이 시에 나타난 ‘백골’의 이미지는 그의 시 「6 년후」에서는 ‘좋은 백골’로 나타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