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한유(韓愈)

높은바위 2015. 7. 28. 08:33

 

                         산석(山石)  산의 돌

 

山石犖确行徑微(산석낙학행경미)               산의 돌은 울묵줄묵, 길은 좁고,

黃昏到寺蝙蝠飛(황혼도사편복비)               황혼에 절에 다다르니 박쥐들 날아다니네.

升堂坐階新雨足(숭당좌계신우족)               법당에 올라 섬돌에 앉으니 비가 막 지나가고,

芭蕉葉大梔子肥(파초엽대치자비)               크게 자란 파초 잎에 치자도1) 잘 열렸네.

 

僧言古壁佛畵好(승언고벽불화호)               좋은 옛날 불화가 있다는 노스님 말씀 듣고,

以火來照所見稀(이화래조소견희)               등불 들고 비춰보니, 과연 보기 드문 불화였다네.

鋪狀拂席置羹飯(포상불석치갱반)               자리 깔고 상을 차려 국과 밥을 내왔는데,

疎糲亦足飽我飢(소려역족포아기)               시장한 배 채우기엔 소찬일망정2) 넉넉했네.

 

夜深靜臥百蟲絶(야심정와백충절)               밤이 깊어 자리에 들자 벌레 소리 잠잠한데,3)

淸月出嶺光入扉(청월출령광입비)               맑은 달이 재를 넘어 사립으로 들어오누나.

天明獨去無道路(천명독거무도로)               날 밝자 홀로 나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出入高下窮煙霏(출입고하궁연비)               자욱한 아침 안개, 길을 가려 헤매었네.

 

山紅澗碧粉爛漫(산홍간벽분란만)               산은 다홍, 내는 푸르러 어지러울 지경인데,

時見松櫪皆十圍(시견송력개십위)               가끔 보이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는4) 굵고 거칠다.5)

當流赤足蹋澗石(당류적족답간석)               냇물 위에서 맨발로 돌 위를 걸어보니,

水聲激激風吹衣(수성격격풍취의)               물소리는 촬촬,6) 바람에 옷자락이 날린다.

 

人生如此自可樂(인생여차자가락)               인생은 이렇듯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데,

豈必局束爲人鞿(기필국속위인기)               어찌 몸을 얽매어 남의 굴레를 받을쏘냐.7)

嗟哉吾黨二三子(차재오당이삼자)               아아, 뜻 맞는 벗들이여!8)

安得至老不更歸(안득지로불갱귀)               어이하여 늙도록 돌아갈 생각을 않느뇨?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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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자(梔子) : 식물.

 

2) 소려(疎糲) : 려(糲)는 거친 쌀. 거친 차와 담백한 밥을 지칭.

 

3) 백충절(百蟲絶) : 갖가지 벌레들이 모두 울음소리를 멈추었다.

 

4) 역(櫪) : 상수리나무.

 

5) 위(圍) : 두 손으로 안은 것을 일 위(一圍).

               십위는 수목이 크고 거친 것을 말함.

 

6) 격격(激激) : 물이 급히 흐르는 소리.

 

7) 기(鞿) : 남의 속박을 당하는 것을 뜻함.

 

8) 오당이삼자(吾黨二三子) : 한유의 뜻을 함께 하고 같은 길을 가는 친구.

 

9) 안득지로불경귀(安得至老不更歸) : 우리가 이렇게 나이 먹고 늙었는데, 이제쯤 미련 없이

                                                     관직을 내려놓고, 이 한적한 세상으로 돌아올 생각을 못하시오?

 

 

 

* 한유(韓愈 : 768-824)는 중당(中唐)의 유학자, 시인, 문장가(儒學者, 詩人, 文章家)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이며, 하남성 창려(昌黎)에서 태어났기로 ‘昌黎 선생’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공부에 힘써 진사(進士)에 급제했는데, 성격이 강직(剛直)하여 남들과 불화(不和)했으며, 오랫동안 국자감사문박사(國子監四門博士), 국자박사(國子博士) 등으로 있다가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노불(老佛, 노자와 불교)을 배척하여 유가(儒家)를 수호하고, 고문복고운동(古文復古運動)의 주축이 되어 문장의 자연 복귀, 고문 부흥 등을 주장했으며, 맹자(孟子)를 아성(亞聖)으로 존칭함도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문복고운동은 유종원(柳宗元)의 작품을 뒷받침으로 훌륭히 성공하였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유의 시는 비록 이전의 많은 사람들이 걸작이라고 떠받들었지만, 그것은 유학자로서 그의 비중에 기울어진 평가였다.

그의 시는 천재와 기백이 뛰어나지만 감정이 결핍되고 괴벽한 것이 많았다.

 

문장에 있어서는 유종원(柳宗元)과 병칭하여 韓柳라 하고, 시로는 백낙천(白樂天, 거이居易)과 나란하여 韓白이라 일컬어졌다.

헌종(憲宗)이 불골(佛骨)을 맞아들이므로 표(表)를 올려, 임금의 노여움을 사 조주(潮州)로 귀양갔다가, 임금의 후회로 원주(袁州)로 옮겨지기도 했다.

문집에 ‘창려집(昌黎集 40권), 외집(外集 10권)’이 있다.

 

이 시, <산석(山石)>은 801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씌어진 시이다.

산경(山景)을 묘사한 것으로, 첫 구의 산석(山石)을 제목으로 삼았다.

깨끗하고 명백한 시어로 속세를 떠난 산림과 옛 사찰을 묘사하며, 그가 겪고 있던 정치상의 실의와 억울함, 피세적(避世的)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