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북유럽

스웨덴: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Tomas Transtromer)

높은바위 2023. 4. 26. 08:14

 

고독한 스웨덴의 집들

 

뒤엉킨 검은 가문비나무와
연기 뿜는 달빛.
이곳에 나지막이 엎드린 작은 집이 있고
한 점 삶의 기미도 없다.
 
이윽고 아침 이슬이 웅얼거리고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어
올빼미를 내보낼 때까지.
 
멀리 떨어진 곳에는 새 건물이
김을 내뿜으며 서 있고,
세탁소의 나비가
모퉁이에서 퍼드덕거린다.
 
죽어가는 숲의 한가운데서
퍼덕이는 나비, 그곳에서 썩어가는 것이
수액(樹液)의 안경을 통해
나무껍질 뚫는 기계의 작업을 읽는다.
 
짖어대는 개 위로
삼단 같은 머릿결의 비 또는
한 점 고독한 천둥구름을 동반한 여름이 있고,
씨앗이 땅 속에서 발길질하고 있다.
 
흔들리는 목소리들, 얼굴들이
황야의 먼 거리를 가로질러
발육부진의 잽싼 날갯짓으로
전화선 속을 날아간다.
 
강 속에 있는 섬 위의 집이
자신의 초석(礎石)을 골똘히 생각한다.
끊이지 않는 연기, 누군가가
숲의 비밀문서를 태우고 있다.
 
비가 하늘을 선회하고
불빛이 강 속에서 사리를 튼다.
비탈 위의 집들이
폭포의 흰색 황소들을 감독한다.
 
일단의 찌르레기 무리를 거느린 가을이
새벽을 저지하고,
사람들이 불 켜진 극장에서
굳은 동작으로 움직인다.
 
이들이 경보(警報) 없이
위장한 날개들을 느끼고,
어둠 속에 사리를 튼
신(神)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라.

 

* * * * * * * * * * * * * * *

 

* 토마스 예스타 트란스트뢰메르(Tomas Gösta Tranströmer, 1931년 4월 15일 ~ 2015년 3월 26일)는 스웨덴의 시인, 번역가이다.

201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독일의 페트라르카 문학상, 보니어 시상(詩賞), 노이슈타트 국제 문학상 등 다수의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 출신 시인.

193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스톡홀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방에서 심리상담사(psychologist)로 사회 활동을 펼치는 한편, 20대 초반에서부터 70대에 이른 현재까지 모두 11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의 시는 지금까지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한마디로 ‘홀로 깊어 열리는 시’ 혹은 ‘심연으로 치솟기’의 시이다.

또는 ‘세상 뒤집어 보기’의 시이다.

그의 수많은 ‘눈들’이 이 세상, 아니 이 우주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시 한편 한편이 담고 있는 시적 공간은 무척이나 광대하고 무변하다.



잠과 깨어남, 꿈과 현실, 혹은 무의식과 의식 간의 경계지역 탐구가 트란스트뢰메르 시의 주요 영역이 되고 있지만, 처녀작에서는 잠 깨어남의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 전도되어 있다.

초기 시에서 깨어남의 과정이 상승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강/낙하의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시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하강의 이미지 주변에는 또한 불의 이미지, 물의 이미지, 녹음(綠陰)의 이미지 등 수다한 군소 이미지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트란스트뢰메르는 이미지 구사의 귀재, 혹은 비유적 언어구사의 마술사임을 알 수 있다.



초기 작품에서 스웨덴 자연시의 전통을 보여주었던 그는 그 후 더 개인적이고 개방적이며 관대해졌다.

그리고 세상을 높은 곳에서 신비적 관점으로 바라보며, 자연 세계를 세밀하고 예리한 초점으로 묘사하는 그를 스웨덴에서는 '말똥가리 시인'이라고 부른다.



순간에 대한 강렬한 집중을 통하여 신비와 경이의 시적 공간을 구축하면서 우리들의 비루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트란스트뢰메르.

전통과 현대, 그리고 예술과 인생의 빛나는 종합을 성취하였으며 자연과 초월과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시인의 작품을 통해 심연으로 치솟기, 혹은 홀로 깊어 열리는 시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 발간된 저서로는 『기억이 나를 본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