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들 가운데 하나다.
성은 원시인부터 원초적 본능이었고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문제였을 테니까 특별히 우리 시대의 화두라고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 개방 풍조가 우리보다 한참 앞선 미국조차 성 담론이 공공연해진 것은 겨우 반 세기 전부터다.
1940년대 후반에 나온 《킨제이 보고서》와 1950년대 초에 창간된《플레이보이》가 성 담론의 공론화를 주도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말론 브랜도,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이 섹스 이미지를 내세웠다.
요즘도 우리나라에서는 성 담론의 공론화를 둘러싸고 심심치 않게 논란이 벌어진다.
TV에서 대사의 수위를 놓고 심하다는 반응과 괜찮다는 반응이 나누어지고, 영화에서 노출의 수위를 놓고 포르노냐 예술이냐는 논쟁이 일어나며, 청소년의 성 의식의 수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성 의식이 바람직한지는 개인에게 달린 문제이고 철학적 논의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은 하늘의 뜬구름을 잡는 학문이 아니라 시대의 쟁점을 붙잡고 씨름하는 학문이다.
성이 과연 우리 시대의 핵심 화두인지는 시간이 좀 더 흘러야 분명해지겠지만 적어도 그 후보들 가운데 하나라면 철학도 성을 둘러싼 논쟁을 모른 체할 수는 없다.
성은 우리에게 어떤 의의가 있을까?
성의 핵심 기능은 자식 얻기이며 따라서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만 섹스를 허용해야 한다는 견해는, 유교 문화권 안에서 가부장제 사회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무시할 수 없는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젊은 세대는 결혼과 상관없이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심지어 사랑하는 마음 없이 섹스를 즐길 수 있다는 태도도 드물지 않다.
이런 성 의식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에 대한 견해와 태도는 사랑 있는 섹스나 사랑 없는 섹스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사랑에 대한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숱하게 많은 유행가가 시도했지만 철학에서 대표적인 사랑으로 알려진 것은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다.
플라토닉 러브는 사전의 정의와 달리 육체관계를 배제하지 않지만 좀더 깊은 뜻이 있다.
성이 현대인에게 지닌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섹스와 사랑이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여성과 남성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지위와 관계 또는 성 차별은 바람직한 성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여성과 남성의 문제는 페미니즘(feminism)이라 부르는 여성주의 또는 여성 해방 논의가 많이 다루고 있다.
따라서 성의 의의를 밝히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담론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루마 - River Flows In You & Kiss The Rain (Piano And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