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프랑스

베를렌느

높은바위 2015. 1. 30. 09:32

 

 

                        네버모어

 

추억이여 추억이여 어쩌자는 거냐

가을은 느른한 대기 속을 지빠귀새가 날게 하고 

태양은 북풍이 울부짖는 단풍숲 위에 단조로운 햇빛을 던지는데

그때 우리들은 둘이서 꿈꾸듯 걸어갔었지

 

그녀와 나, 머리털과 생각을 바람에 휘날리며.

갑자기 그녀는 감동스런 눈초리를 나를 향해 던지더니

어떤 날이 가장 좋아요, 그녀의 생생한 금빛 목소리

 

신선한 천사 같은 음색의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

신중한 미소가 그녀에게 대답했지

오 나는 헌신적으로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네

 

오! 처음 피는 꽃들이라 향내가 어떠했던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처음의 예스

정말 매혹적인 울림으로 소리를 내네.

 

 

* "그 누구보다도 교묘하게 운율학을 이용하였고, 정형시를 다시 젊게 하려고 시도했던 시인"(위스망)이라는 평을 듣는 베를렌느는 무엇보다도 음악을 노래했고, 다채로운 기교를 구사하여 음영(陰影)을 구했다.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

 

내 가슴에 조용히 비가 내리네

마을에 비가 내리듯

내 가슴 속에 스며드는

이 우울함은 무엇일까

 

땅과 지붕 위에 내리는

부드러운 빗소리여

우울한 가슴에 울리는

오 비의 노래여

 

병든 이 가슴에

공연히 비가 내리네

오 뭐라고, 배반이 아니라고

이 슬픔은 이유가 없네

 

이유를 모르는 건

가장 나쁜 고통

사랑도 증오도 없지만

내 가슴은 고통투성이네

 

 

* 이 시는 1872년에서 다음 해에 걸쳐 친교를 맺어 온 나이어린 소년 시인 랭보와 더불어 영국과 벨기에 각지를 유랑하는 동안에 쓰여진 것.

1874년에 작자가 권총으로 랭보를 쏘아 부상입힌 사건으로 해서 벨기에의 몬스 감옥에 갇혔을 때 간행된 시집인 <언어 없는 연가>에 수록되어 있다.

 

 

 

                         어느 여인에게

 

내게 이 노래, 부드러운 꿈이 웃고 우는

네 큰 눈의 마음 달래는 우아함으로 해서

순결하고 선량한 영혼으로 해서

내 격렬한 비탄에서 우러나온 이 시를 바친다.

 

아아, 나를 계속 사로잡는 불길한 악몽은

끊임없이 분노하고 발광하고 질투한다.

이리의 행렬처럼 갈수록 수가 늘면서

피로 물들인 내 운명에 매달리느니.

 

오! 이 괴로움, 몸서리치는 이 괴로움

에덴에서 추방된 최초의 인간의 첫 신음소리도

내게 비하면 한갓 목가일 뿐이다.

 

그리고 네게 수심이 있다면 그것은

내 사랑아, 서늘한 9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

오후의 하늘을 날고 있는 제비와도 같다할지니.

 

 

* 베를렌느(Paul Veraine : 1844-1896)는 멧스에서 태어나 7세 때 파리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1866년에 처녀시집 <사튀르니앙 시집>을 간행하였다.

마틸드 모테를 사랑하여 1870년에 그녀와 결혼했으나, 과음과 천재소년 랭보와의 교제로 가정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 넣었다.

끝내 아내를 버리고 랭보와 함께 영국과 벨기에 등지를 방랑하다가 1873년에 권총으로 랭보를 쏘고 몬스 감옥에서 2년 동안 복역하였다.

그 영창생활 중에 가톨릭으로 귀의하여 그의 생애 걸작이라 하는 <예지>(1881)의 시상을 얻었다.

만년에는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나 가난과 류마티스로 고생하다가 매춘부였던 정부의 불결한 방에서 죽었다.

이 시는 베를렌느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마틸드 모테와의 연애시절에 창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