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맹문장(猛文將) 전임(田霖) 이야기

높은바위 2025. 1. 30. 07:08

 

세조, 성종 때 청백리 전임(田霖=漢城判尹한성판윤)은 청백과 절의에 어찌나 날카롭고 위엄이 깍듯한지 <맹문장(猛文將)>이란 별칭으로 불리었었다.

전임(田霖)이 판윤으로 있을 때, 왕자 회산군 염(檜山君 )의 집을 지나다가 말을 멈추고, 역사(役事)를 주관하는 이를 불러 다음과 같이 일렀다.

"집을 지음에 칸수와 높고 낮은 치수는 법도가 있으니, 네가 죽기를 싫어하거든 아예 지나치게 하지 말라."

저녁때 그 사람이 마중 나와서 말했었다.

"많은 것은 헐고 긴 것은 끊어 감히 법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전임이 말하기를,

"애초에 제도를 어긴 것은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나, 이미 규정을 지켜 행했으니 용서한다. 후에 다시 범하면 마땅히 전의 죄까지 합쳐서 다스릴 것이다." 《寄齋雜記기재잡기》

 

이조 오백 년에 임금으로서 연산군의 횡포가 가장 혹심했다면, 조신(朝臣)으로는 세조 쿠데타[계유정란]의 행동대로서 득세한 홍윤성(洪允成=右議政우의정, 1425년 ~ 1475년 음력 9월 8일)의 횡포가 가장 혹심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집문밖을 흐르는 한강변 시내에서 말을 씻어 냄새를 피운다고 사람과 말을 잡아다가 죽였다.

남의 논을 빼앗아 미나리를 심었는데 이를 항의한다고 돌로 처 죽였다.

어릴 때 그를 기른 삼촌이 그의 아들을 관에 써달라고 청탁하자, 그 대가로 삼촌의 논을 요구하였다.

조카 하나 앞길 터주는데 대가를 요구함은 혹심하다했더니, 박살하여 묻어버렸다.

이 같은 횡포는 그의 종들까지 연쇄적으로 퍼져, 남의 물건 빼앗고, 강간하고, 살인하는 걸 예사로 하였던 것이다.

 

전임이 포도부장(捕盜部將)의 하직으로 있을 때, 당번으로 도적을 잡으려고 재인암(才人岩) 곁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곳은 홍윤성 집과 가까운 곳이었다.

약탈하는 대여섯 명의 도둑을 적발하자, 이들은 오히려 홍윤성의 노복들임을 자처하고 감히 어찌하겠느냐고 대어들었다.

전임은 이들을 손수 묶어놓고 날이 새자 이들을 이끌고 홍정승 앞에 간 것이었다.

"세력을 믿고 함부로 행동하니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홍공에게 누가 될까 두려웁습니다."

하고 인계하였던 것이다.

 

이성이 마비된 홍윤성에게는 너무나 당돌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권위에의 대담한 법의 도전이었던 것이다. 

홍윤성은 이 일개 포장이 누린 하찮은 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용기가 희한해서, 전임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좋은 사람을 어찌 이제야 알게 되었는가. 자네 술은 얼마나 마시며 밥은 얼마나 먹는가."라고 물었다.

전임이 대답하기를,

"오직 공께서 명하시는 대로 먹겠습니다." 하니 곧 밥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혼돈반(混沌飯)같이 만들고, 술 세 병들이나 되는 한 잔을 대접하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우고 단숨에 그 술을 들이켰다.

여기서 혼돈반이 바로 비빔밥이다.

 

어느 날 전임이 홍윤성에게 갔더니 때마침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여종 하나를 뜰안 밑 나무에 묶어놓고 활을 메워 막 쏘려 하고 있었다.

전임이 그 까닭을 물으니 홍정승은,

"한번 불러서 대답을 하지 않기에 죽이려 한다." 하므로 전임이,

"죽여버리기보다는 소신에게 주시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하였더니 웃으면서, 

"그렇게 하려무나." 하고 곧 풀어 주어, 전임이 종신토록 데리고 살았다. 《寄雜記기재잡기》

 

이 인간극한에서 그의 재치 있는 용기가 이같이 인간과 법을 더불어, 권위의 횡포에서 구해낸 것이었다.

 

무장(武將)이지만, 청백리로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엄격한 성격으로 아들이 행패를 부린 데 대하여 격분하여 살해하고도 태연자약하였다.

1509년(중종 4), 그가 병이 들었을 때 찾아온 친구 김전(金詮)과 큰 그릇으로 술을 나누어 마시고 난 뒤, 김전이 집 밖을 나서기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호는 위절(威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