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두보(杜甫)

높은바위 2015. 7. 21. 09:42

 

 

                          등고(登高)  높은 곳에 올라

 

風急天高猿嘯哀(풍급천고원소애)                  바람 부는 쓸쓸한 가을에 원숭이는 울고,

渚淸沙白鳥飛廻(저청사백조비회)                  물 맑은 흰 모래 위에 갈매기 난다.

無邊落木蕭蕭下(무변락목소소하)                  사방의 나무에서는 잎이 우수수 지고,

不盡長江滾滾來(부진장강곤곤래)                  끝없는 강물은 굽이쳐 흐르네.

萬里悲秋常作客(만리비추상작객)                  고향을 떠나 이 슬픈 가을 나그네 신세 되어,

百年多病獨登臺(백년다병독등대)                  병든 몸을 이끌고 이곳에 올랐네.

艱難苦恨繁霜鬢(간난고한번상빈)                  고생도 한스러운데 머리털마저 희어지니,

潦倒新停濁酒杯(요도신정탁주배)                  늙은 몸 탁주잔도 들지 못하겠네.

 

 

 

* 두보가 56세 때 지은 한시(漢詩)로 출전은 《두시언해(杜詩諺解)》 초간본 권10 이다.

시의 제재는 중양절(重陽節)의 등고(登高)라는 행사인데, 등고는 중국에서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높은 곳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며, 수유를 머리에 꽂아 액땜을 하던 행사이다.

등고를 하려고 높은 대에 오른 화자(話者)가 가을의 적막함과 자신의 서정을 구슬프게 읊은 7언율시(七言律詩)로서, 자연의 흐름 속에 비춰진 인생의 무상함이 대구법과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묘사를 통해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시의 전반부에서는 가을의 적막한 정경과 강가의 쓸쓸한 모습을 노래하고 후반부에서는 외로운 나그네의 슬픔과 노년의 처량한 탄식을 노래하였다.

 

두보의 인생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적인 안타까움에 콧등이 시큰해지며, 정해진 각본 같은 인간의 운명이란 것에 짜증까지 나려한다.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불리며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함께 성당시기를 이끈 중국 최고의 시인 중 하나다.

그의 인생과 시풍은 이백과 여러 가지로 대비되며, 특히 그는 생전에 시명(詩名)이 있긴 했지만 이백처럼 크게 이름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천재적인 시의 완성도에 비해 그의 인생은 ‘어쩜 저렇게 지지리도 가난할까?’라고 짜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두보(712년∼770년)는 자가 자미(子美), 호북(湖北) 양양(襄陽)사람이다.

그의 조부는 초당 시인 두심언(杜審言)이었고, 그의 부친은 두한(杜閑)으로 낮은 벼슬을 했다지만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고, 두보 때는 대단히 가난했다.

 

두보는 어릴 때 병이 많았지만 학문을 좋아하였고,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4∼15세에 이미 당시 문사들과 시로써 주고받았다.

하지만 24세에 장안으로 가서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하여, 이후 근 10여년을 산동, 산서, 하남 등지를 유랑하며, 이백․고적(高適) 등과 시로써 화답하는 시절을 보냈다.

747년 그의 나이 34세 무렵에 장안으로 와서, 몇 번의 시험에서도 모두 낙방하고 실의와 가난 속에서 생활을 하였지만, 현실의 사회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나이 40에 현종이 제사대전(祭祀大典)을 거행할 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올려 그에게 대제집현원(待制集賢院)의 벼슬을 내렸지만, 당시 재상인 이임보(李林甫)는 끝내 발령을 내지 않았다.

두보는 더욱 빈곤해졌고, 통치자의 부패와 하층민의 고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병거행(兵車行)>은 현실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장안에서 10여년을 보내는 동안 마침내 군대의 창고를 관리하는 조그마한 벼슬, 즉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府兵曹參軍)이란 벼슬을 받고, 가족을 데리러 봉선현(奉先縣)(지금의 섬서성 포성(蒲城))에 갔는데, “문에 들어서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고, 어린 자식이 이미 굶어서 죽었다네(入門聞號咷, 幼子饑已卒.).” 이런 기막힌 일을 당한 두보다.

 

그래서 통치자들의 사치와 부패를 고발한 <경사에서 봉선현으로 가며 느낀 시 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지었는데, 사실 그의 마음이야 어디 500자에 그치겠는가?

그 속에 나오는 구절 “귀족들의 집에는 술과 고기 썩는 냄새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사람의 뼈가 뒹군다.(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는 바로 그들에 대한 원망을 축약한 것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왜 우리의 <춘향전>에서 어사또가 읊조린 한시, “금 술잔에 좋은 술은 수많은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온 백성 기름이라.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아진다.(金樽美酒 千人血, 玉搬佳酵 萬成膏. 燭淚落時 民淚落, 歌聲高處 怨聲高)”가 오버랩되고, 백거이의 <경구(輕裘)>, “술독과 병은 술로 넘치고,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올해 강남은 크게 가물어, 구주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는데.(樽罍溢九酝, 水陸羅八珍.…是歲江南旱, 衢州人食人.)”가 생각나는 걸까?

 

참 복도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벼슬이라고 할 수 없는 하급직 하나 겨우 얻어, 가족을 데리러 봉선(奉先)에 간 동안,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고 만다.

그의 나이 44세(755년 11월) 때다.

그래서 가족을 이끌고 피난을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 반란군에게 잡혀(756년), 다시 장안으로 보내진다.

 

이듬해 그의 나이 46세 때 숙종이 봉상(鳳翔)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숙종을 배알하고, 좌습유(左拾遺)란 관직을 하사받는다.

이 짧은 2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그가 경험한 역경의 깊이만큼 불후의 작품, <애왕송(哀王孫)>,<비진도(悲陳陶)>,<비청판(悲靑坂)>,<춘망(春望)>,<애강두(哀江頭)>,<희달행재소(喜達行在所)3수>,<술회(述懷)> 등이 나왔다.

 

장안도 수복되어 안정되어 갈 무렵, 방관(房琯)을 구원하는 글을 올려, 화주(華州)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폄적을 당하여, 장안으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삼리삼별(三吏三別)은 화주(華州)에서 하남(河南)으로 가는 도중에 전쟁과 세금으로 인해 백성이 받는 고통을 읊은 시다.

 

759년 장안일대에 대기황이 들어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가족을 이끌고 진주(秦州: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천수(天水))․동곡(同谷) 일대의 황간벽지에서 머물며, 겨우 초근목피로 생활하다가, 결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성도(成都)로 들어갔다.

친구의 도움으로 완화계(浣花溪) 옆에 초당을 짓고 잠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잠깐 그해 가을 태풍에 초당이 무너졌고, 762년에는 성도 소윤(少尹) 서지도(徐知道)가 난을 일으켜 두보는 어쩔 수 없이 배를 하나 사서, 선상생활을 하게 된다.

마침 친구 엄무(嚴武)가 검남(劍南)의 절도사가 되어 사천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를 절도참모검교공부원외랑(節度參謀檢校工部員外郞: 이 때문에 후세에 그를 ‘두공부(杜工部)’라 부름)에 추천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54세 되던 해, 엄무가 병으로 죽자 사천에서 의지할 곳이 없던 두보는 가족들을 배에 싣고 기주(夔州: 지금의 사천성 봉절현(奉節縣))에 이르렀다.

이곳에 기거한 약 2년간 두보는 회고시를 많이 썼는데, <秋興8수>는 이 시기에 쓴 작품이다.

 

두보는 768년 기주를 떠나 다시 강릉(江陵), 공안(公安), 악주(岳州: 즉 岳陽), 형주(衡州: 즉 衡陽) 등지를 배로 떠돌다가, 770년 나이 59세에 상수(湘水)의 뢰양(耒陽)에 이르러 건강이 나빠져 죽고 만다.

그의 죽음에 있어서도, 너무 굶주린 끝에 친구가 보낸 돼지고기 등에 급채해서 죽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굶주림은 곧 두보의 인생을 대신 설명해주는 단어로 인식될 정도다.

 

마지막으로 그와 관련된 사천의 ‘우리우위(五柳魚)’라는 요리에 대해 언급할까 한다.

 

그가 사천의 완화계 가에 살 때다.

그는 너무도 가난하여 매일 채소반찬으로 세월을 보냈기에 그 지역에서는 그를 ‘채두노인(菜肚老人)’이라고 불렀다 한다.

 

어느 날 그가 친구 몇 명을 초당으로 초대하여 시를 짓고 읊었는데 매우 흥겨워 점심때가 된 줄도 몰랐다.

두보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는데, 눈치를 보니 점심을 먹을 작정인 듯한데, 집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무엇으로 손님들을 접대할 것인가?

그는 마음이 조급하던 차에 갑자기 식구가 완화계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오지 않은가?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저것으로 손님들을 대접하리라고 생각했다.

 

두보가 웃으며, “기다려봐! 내가 오늘 여러분께 직접 음식을 대접하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생선의 배를 갈라 씻은 뒤에, 조미료를 뿌리고 솥에 쪘다.

다 찐 뒤에 또 그 지역의 달콤한 간장을 넣고 볶고, 사천의 매운 고추, 대파, 생강과 국간장, 그리고 전분가루 약간 등을 섞어서 장을 만든 뒤에, 뜨거울 때 고기 위에 얹고, 쌍차이(香菜)를 걷어내면 완성되었다.

 

친구들은 방안에 앉아 두보가 생선을 내오자, 젓가락으로 맛을 보니 정말 맛이 있었다.

친구들이 말을 하며 생선을 먹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물고기를 다 먹어버렸지만 그 생선의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그 생선의 이름을 의논했는데, 어떤 이는 ‘이 생선은 후완화위(浣花魚)로 부르자!’고 하였고, 어떤 이는 ‘라오뚜위(老杜魚)로 부르는게 적당해!’라고 하였다.

 

마지막에 두보가 “도연명(陶淵明)은 우리들이 존경하는 선현(先賢)인데, 이 생선은 등과 배에 다양한 색깔의 선이 있어 마치 버들잎 같으니 ‘우리우위(五柳魚)’라고 부릅시다!”라고 하였다.

모두들 찬성하며 그 이름이 매우 재밌다고 여겼다.

오류어는 이렇게 해서 불려지게 되었고, 사천의 유명한 요리가 되었다고 한다.

쓰르라미 울 적에 - Birth and De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