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독일

독일시의 흐름

높은바위 2015. 2. 10. 15:46

 

 

게르만인은 일찍부터 루네 문자를 가지고 있어서 주문 같은 것은 나무나 돌에다 새겼지만 시가 따위는 대개 구전에 의하여 전승되었다.

완전한 문자로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에 그리스도교와 더불어 라틴 문자가 전해 들어온 이후의 길이다.

주문으로서는 오직 <메르세부르크의 주문>만이 요행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4세기에 들어서 고트인으로서의 불필라라는 사람이 <성서>를 고트어로 번역을 했는데, 이것이 넓은 뜻으로서의 독일문학의 최고의 문헌이다.

그러나 독일어로 씌어진 문헌 중에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대체로 8세기 경, 즉 카를대제 이후의 것으로 이교적인 영웅시의 단편인 <힐데브란트의 노래>가 유명하다.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게르만족의 영웅시의 편린은 겨우 이 단편에서 엿볼 수 있는 정도이고, 당시의 이교적인 노래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손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9세기 이후 게르만의 영웅은 점점 그리스도교의 영웅으로, 그리고 민중시인은 성직자한테 자리를 물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베소브룬의 기도서> <무스필리> <헬리안트> 같은 것이 그리스도교 문학의 중요 작품이며, 성자의 손으로 엮어진 라틴어 문학은 <발타리우스> <루오틀리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11세기 말부터의 십자군 원정은, 금욕적인 주제에 염증이 난 민중에게 동방세계의 전기와 영웅들의 모험담을 전해주었다.

중세 유럽은 기사계급이 융성하던 시대였다.

그때까지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문화를 흡수하려고 노력했던 독일도 자기의 독특한 정신을 확립하기에 이르렀고, 12세기 말에서부터 13세기에 걸쳐 문학에 있어서도 전에 없는 장관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현존하는 문헌으로 볼 때 이 시기가 문학사상 최초의 융성기이다.

이 시대의 언어를 중고독일어라 부른다.

 

① 중세의 서사시 : 이 시대의 서사시에는 황제와 제후의 궁정에서 기사나 귀족 간에 발달한 궁정서사시와 일반 서민 간에 이루어진 작자 불명의 민중서사시가 있다.

전자는 라틴문학이나 프랑스문학에 대해 교양이 높았던 기사들의 손에서 나온 것인 만큼 주제도 그런 방면에서 취한 것이 많았으며 아더왕 전설과 성배설화가 중심이 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작가는 <에네이트>를 쓴 하인리히 폰 펠데케, <가련한 하인리히> <그레고리우스> <에레크> <이봐인>의 작가 하리트만 폰 아우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남긴 고트프리프 폰 슈트라스부르크와, 걸작 <파르찌발>의 시인 볼프람 폰 에션바흐와 같은 사람들이다.

민중서사시는 소재와 사상이 독일의 고유한 것으로서 작자의 이름은 대개 불명이지만 게르만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리벨룽겐의 노래>와 <구두룬의 노래>로 전자는 고대 게르만이나 북방의 전설에서 취재한 민중서사시를 집대성한 것으로 독일의 <일리아스>라고 불리우며, 후자는 그 이후의 독일 최대의 서사시로서 독일의 <오딧세이>라고 불리운다.

 

② 민네상과 종교극 : 중세의 서정시는 대개 궁정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이며 보통 민네상이라고 불리우며 귀부인에 대한 기사의 사모의 정을 노래한 것이 많다.

작가는 자기의 시를 위해 자신이 작곡을 하고 이것을 읊어서 들려 주었다.

이밖에도 민요가 있어 궁정 서정 시인의 제1인자 포켈봐이데는 이런 민중시의 장점도 취하여 거기에다 사상적인 깊이를 부여하였다.

15세기 이후 수공업자 사이에 시작이 유행하여 그중에서 걸출한 시인은 직장가인(마이스터게상)이라고 불렀다.

뉴픈베르크시의 한스 삭스는 그 중에서 가장 탁월한 대표자였다.

 

③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 15~16세기의 독일 사상계에 일어난 커다란 일은 이탈리아에서 파급된 르네상스운동과 이와 합류한 인문주의의 사조와 루터의 종교개혁이었다.

인문주의의 에라스무스 · 로이홀린과 같은 대표자를 거쳐 후덴에 이르러서 교권에 대한 반항이 되었다.

그밖에 에크하루트 등의 신비주의 사상도 깊이 독일인의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었는데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 양자를 통일하였다.

루터는 음악과 문학의 영역에도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여 특히 원전을 바탕으로 한 성서번역에 의하여 현재 사용되고 있는 표준 독일어, 즉 신고독일어 완성에 공헌한 일은 문화사상 불후의 공적이었다.

 

15세기 후반 구텐베르크에 의한 인쇄술의 발명이 사상과 문학의 보급에 다대한 공헌을 한 일과, 17세기의 산문계에 30년전쟁에서 취재한 <모험가 심플리시무스>를 내놓아 독일문학의 기염을 토한 그림멜스 하우센의 이름은 여기에 특기해야 되겠다.

 

13세기에 한번 개화했던 독일문학은 그후 오랫동안 침체상태에 떨어졌다.

더구나 30년전쟁으로 황폐한 독일문화는 거의 그 독립성을 잃어버렸다.

오피츠는 시학의 이론에는 정통하였지만 프랑스문학의 숭배자였다.

그러나 스위스의 젊은 시인들, 특히 보드머 · 브라이팅거는 감정의 고양을 부르짖고 여기에 대항했다.

클롭스토크는 깊은 종교적 감정과 억센 국민의식의 소유자였으며 <구세주>는 18세기 문단의 경이였고 그밖의 송가에도 볼만한 것이 있다.

이 시대의 문인 중 낭만적인 작풍에다 고전적이며 밝은 관능의 아름다움을 곁들인 <오베론>의 시인 뵐란트도 빼놓을 수 없다.

 

1740년부터 55년 사이에 태어난 젊은 시인들은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구호 밑에 이지적인 문학에 반항하고 끓어오르는 감정이 움직이는대로 모든 법칙을 무시하고 행동하려 하였으며 여기에 천재시대를 이룩하게 되었다.

클링거의 희곡 <스투룸 운트 드랑>의 내용이 이 시대 풍조를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1767년부터 10수년간을 문학사상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대표자는 괴테이다.

 

그밖에 클링거 · 하인리히 · 봐그너 · 렌쓰 · 라이제비츠 · 뮐러도 이 문학운동의 대표자였지만, 이 운동의 진정한 지도자이며 중심이었던 것은 사실은 헤르더였다.

그는 각국의 민요를 손수 수집하여 <시가에 나타난 각 민족의 소리>  초판을 <민요집>이라고 이름을 붙여 발표하였다.

스투룸 운트 드랑 운동은 이윽고 완성의 시대, 전아스럽고 고요한 고전주의 시대를 초래했다.

 

1788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괴테는 <이피게니에>를 발표, 밝고 지순한 인간성의 발휘에 의하여 온갖 죄가 정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그리이스와 다른 민족과의 융화를 실현시켰다.

20대로부터 죽기 1년 전까지 60년의 세월을 소비한 <파우스트>는 독일 문학사상 최대의 걸작이며, 주인공 파우스트의 영혼은 '영원의 여성'의 인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간다.

 

칸트 철학에 경도했던 쉴러는, '숭고한 정신은 도덕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고, 미가 자연성을 발휘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며, 예술의 사명도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서정시는 미와 윤리를 예술로써 통일한 것이다.

 

18세기 말에서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낭만파의 운동은, 앞서 있었던 오성만능의 계몽주의에 대항해서 감정과 공상의 주체성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 파의 시인들이 지닌 마음의 고향은 조국 독일의 중세였으며 숭배하는 시인은 셰익스피어와 괴테이다.

그들은 고전적인 형식미에 대항해서 서정적, 음악적, 혹은 미완성의 미를 높이 평가하고, 그 작품이 단편으로 끝나는 것도 싫어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상을 가장 자유분방하게 구사할 수 있는 동화가 그들이 즐기는 형식이었다.

 

그리이스에 도취했던 휠더린은 이 파의 선구자라 할 것이다.

이보다 늦게 나온 호프만 · 아이헨도르프 · 브렌타노 · 아르님은 후기 낭만파라 불리우며, 울란트 · 메리켓 · 샤미소와 같은 슈봐벤 시파와 하이네가 이 파에 속한다.

이들과 시대를 같이 하면서도 이 파에 속하지 않고, 독일 문학사상 유니크한 존재로서 34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클라이스트는 사실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케르너 · 아른트와 같은 애국시인, 류케르트 · 프라텐과 같은 고전적 형식미를 추구한 시인들의 이름도 또한 잊어버릴 수 없다.

<사포>의 시인 그릴파르처는 쉴러 · 클라이스트에 비견하는 오스트리아의 극작가이다.

 

꿈의 세계에서 노닐려던 낭만파의 태도에서 이윽고 현실로 돌아가자는 기운이 생겼다.

여기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이 하이네 · 베르너 · 라우베 등의 청년 독일파의 정치적 문학운동이었다.

그들이 주창한 경향문학은 신랄한 아이러니로서 이채를 띠었는데 문학적인 가치는 적었다.

다만 이 운동이 문학상 사실주의를 촉진시킨 공적은 잊을 수 없다.

스위스의 시인 켈러와 마이어는 전자는 천의무봉의 소박한 시인, 후자는 고아 단정한 감상시인으로서 근대 독일문학을 대표한다.

슈토롬은 풍부한 서정적인 분위기의 시인으로서 유명하다.

 

19세기 말에 독일 자연주의의 운동은 홀츠 · 슐라프 두 사람에 의하여 제창되고 또한 실천되었다.

그리고 세기말적인 퇴폐의 도시로부터 떨어져서, 소박한 전원생활로부터 청신한 생명을 맛보려는 향토예술운동을 대표하는 작자로서는 슈테르 · 헤세 · 스트라우스 등이 있다.

헤세는 토마스만과 더불어 노벨상을 받은 현대 독일문단의 원로격인 사람이다.

 

자연주의의 세례를 받은 후에도, 독일의 시인들은 여전히 낭만적인 요소를 상당히 지니고 있어, 데멜은 신낭만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니체의 초인사상과 서정시인으로서의 우수한 소질은 상징주의의 기초를 세워 이윽고 게오르게와 그 일파를 나오게 하였다.

게오르게와 릴케는 독일시를 세계수준까지 이끌어 올렸다.

특히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는 인간 존재의 미약함과 세계 공간에 내던져진 개인의 고적함을, 그리고 현세의 의의를 발견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찬미하는 대작으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로 칭송되고 있다.

 

1910년경을 중심으로 미술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 표현양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기계 문명과 세속적 욕망에 찌들린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표현주의가 등장하였다.

트라클은 표현주의 시단에서 가장 인정받는 시인으로 인간의 우수, 파괴된 세계에 대한 비애 등을 노래하고, 벤은 추악하고 구역질 나는 대상들을 통해 자신으로부터 소외당하는 현대인의 허무한 모습을 시로 썼다.

 

양차 대전이 끝난 후 전쟁기간 동안의 문화적 공백이 지나고, 외국의 여러 문예사조가 몰려들어 독일의 전통적 문화가 단절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대전 이후의 작가들에게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들의 전통적 문화의 계승이었다.

그것은 "47그룹"이라 일컬어지는 소장 문학인들의 노력으로 나타났다.

문학의 여러 장르들 중에서 시가 비교적 빨리 질서를 되찾고 전통계승의 길로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