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1. 여자의 육체
여자의 육체여 흰 언덕이여 흰 허벅지여
하늘이 준 네 모습은 이 세상과도 비슷하다
건장한 내 농부인 육체는 그 괭이로
대지의 깊이에서 자식을 뛰어 오르게 한다.
나는 늪처럼 고독했다 새들은 내게서 도망쳤고
밤은 무서운 힘으로 내게 덤벼들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너를 무기처럼 단련하였고
이제 너는 내 활의 화살이 되어 나를 섬긴다
하지만 복수의 때가 지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미끄러운 살결과 이끼와 유방이 있는 탐욕의 육체여
아아 항아리 같은 유방! 아아 얼빠진 듯한 그 눈!
아아 볼두덩뼈의 장미! 네 야릇한 슬픔의 소리!
여자의 육체여 나는 네 매력의 포로가 된다.
오오 목마른 끝없는 욕망, 종착 지점없는 길이여!
어두컴컴한 강바닥이여 거기 영원한 목마름이 흐르고
피로가 흐르고 끝없는 고뇌가 계속되는 것이다.
2. 빛이 너를 휘감는다
빛이 그 최후의 불꽃으로 너를 감싼다
환자처럼 창백해진 너는 어찌할 바 모르고
그대로 선 채 너는 너를 감싸고 도는
황혼의 낡은 프로펠러와 맞서고 있다
파괴된 하루의 순수한 상속녀, 나의 처녀여
너는 말이 없구나
불의 생명으로 충만한 이 죽음의 시각에
너는 너 혼자 고독의 절정을 이루고 있구나
태양으로부터 포도송이 하나가 네 검은 의상에 떨어진다
밤의 거대한 뿌리가
돌연 네 혼에서 자라나더니
이윽고 네가 숨기고 있었던 그 무엇을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하여 네 안에서 갓 태어난 창백하고 푸른 민족은
스스로 자양분을 얻는다
아, 검은 색과 황금색의 고리에 묶인 채
자석처럼 모든 것을 끌어안는 다산형의 장대한 여자 노예여
고개를 들어라 손을 뻗어라 하나의 생명을 창조하라
그러나 생명 있는 모든 것은
그 꽃이 시들고 슬픔으로 가득차나니
3. 아, 소나무 숲의 광활함
아, 소나무숲의 광활함이여, 부서지며 울부짖는 파도소리여,
느릿한 빛의 유희여, 외로운 종소리여,
네 눈 속에서 저물어가는 황혼이여, 인형이여,
흙에 묻힌 소라고동이여, 네 안에서 대지가 노래한다!
네 안에서 강이 노래하고, 나의 혼은 강물 속으로 도망친다
네가 바라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곳으로
네 희망의 활 위에 나의 길을 가리켜다오
그러면 나는 쏘리라 미친 듯
나의 모든 화살을
나는 내 주위에서 네 안개의 허리를 보고
너의 침묵은 내 고뇌의 시간을 쫓고 있다
그러나 아침내 내 입맞춤은
투명한 돌의 팔을 가진 네 육체에
닻을 내리고 내 젖은 욕망은 둥지를 튼다
아, 일몰의 시간 속에서 사랑이 물들고 울려 퍼지는
신비한 네 목소리여!
나는 보았다 깊어가는 들녘의 시간에
밀이삭이 바람의 입 속에서 고개를 떨구는 것을
4. 아침은 가득하다
여름의 심장에
폭풍우가 충일하는 아침이다
이별의 하얀 손수건처럼 구름이 여행을 떠나고
바람은 길손의 손을 흔들어 구름을 휘젓는다
우리들, 사랑의 침묵 위에 고동치는
셀 수 없는 바람의 심장
전쟁과 노래를 가득 담은 언어처럼, 오케스트라처럼
나무들 사이에서 신비스럽게 울려 퍼지고,
바람은 날렵하게 가랑잎을 나르고
새들을 겨냥한 화살의 행로를 바꾼다
거품도 일지 않는 파도 위에 가랑잎을 떨어뜨리는 바람
무게 없는 형체, 허리를 구부린 불
입맞춤은 여름 바람의 문전을 두드리고
산산이 부서져 가라앉고 만다
5. 그리하여 너는 나를 들을 것이다
나의 말에 네가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나의 언어는
가끔 해변의 갈매기 발자국처럼
수척해진다
포도알처럼 매끄러운 너의 손을 위한
사슬, 도취한 방울
나는 아주 먼 데서 나의 언어를 본다
나의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너의 것
그것은 담쟁이처럼 나의 옛 상처 위로 기어오른다
그것은 때로 축축한 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이 잔인한 유희는 네가 져야 할 책임이다
나의 어두운 동굴에서 언어가 빠져나간다
모든 것을 너는 채운다 그 모든 것을
너보다 먼저 나는 네가 점령한 고독에
내 언어의 집을 짓는다
너보다 더 나는 슬픔에 익숙해져 있다
지금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내 언어가 말했으면 한다
내가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내 귀가 들을 수 있도록
고뇌의 바람이 아직도 나의 언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꿈의 태풍이 아직도 나의 언어를 때려눕히고 있다
너는 내 슬픈 목소리에 깃든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6. 나는 네 모습을 기억한다
그 해 가을의 너를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다
너는 베레모였고, 가슴은 따뜻했었다
너의 두 눈 속에서는 황혼의 불꽃들이 서로 싸우고
네 혼의 물속으로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넝쿨처럼 나의 팔을 휘감으며 나뭇잎들은
나른하고 온화한 너의 목소리를 주워모았다
그리고 방심의 모닥불 속에서 나의 갈증은 타오르고
감미롭고 푸른 히아신스가 내 가슴 위로 기어올랐다
너의 눈이 여행을 떠난 지금 가을은 멀다
회색의 베레모, 새 소리, 집처럼 아늑한 가슴,
그 쪽으로 나의 애틋한 동경은 이주하고
잉걸불처럼 뜨거운 환희의 내 키스가 떨어진다
배 위에서 쳐다보는 하늘,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평야
너에 대한 나의 추억은 빛이고, 연기이고, 고요한 연못이다
너의 눈 저편에서 황혼이 타오르고
가을의 마른 잎이 너의 혼속에서 선회하고 있다
7. 오후들 속으로 몸을 굽히고
석양에 몸을 구부리고 나는 나의 슬픈 투망을 던진다
대양과도 같은 내 눈을 향해
거기, 난파선의 익사자가
두 팔을 휘젓듯
나의 고독이 드높게 치솟는
모닥불 속에서 나래를 펴고 타오른다
나는 공허한 네 눈 위로 빨간 신호를 보낸다
그 눈은 등대의 가장자리에서 바다처럼 물결치고 있다
너는 다만 어둠만을 주시하고 있다
저 먼 곳에 있는 나의 여자여
이따금 너의 시선에는 공포의 해안이 떠오르곤 한다
석양에 몸을 구부리고 나는 나의 슬픈 투망을 던진다
대양과도 같은 네 눈에서 물결치는 바다를 향해
밤의 새들은 제일 먼저 뜬 별들을 쪼고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할 때 빛나던 바로 그 별들을
밤이 우수의 말을 타고 내달린다
평원에 푸른 이삭을 흩뿌리면서
8. 흰 벌
하얀 꿀벌이여,
너는 꿀에 취해 나의 영혼 속에서 윙윙거리고
나선형의 느릿한 연기 속에서 몸을 비튼다
나는 버림받고 절망한 사내 이제 나의 말에는 반향이 없다
전에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지금은 모든 것을 잃은 사내
내 최후의 동경이 네 마지막 닻줄에서 삐그닥 소리를 낸다
너는 폐허의 내 땅에 최후까지 남은 장미 한 송이
아, 그러나 너는 말이 없구나!
이제 너의 그 깊은 눈을 감아다오.
그 눈에 밤이 나래를 펴리니
아, 무서움에 떨고 있는 육체의 나상(裸像)이여
그 깊은 눈에 밤이 나래를 펴고
너는 싱싱한 꽃의 팔과 장미의 무릎을 갖고 있다
너의 유방은 하얀 달팽이를 닮았고
그림자처럼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너의 배 위에서 잠을 자고는 했지
아, 그러나 너는 말이 없구나!
네가 없는 이 곳에서 나는 외롭다
비가 온다 바닷바람이 길 잃은 갈매기를 쫓고 있다
비가 맨발로 축축하게 젖은 거리를 걷고 있다
저쪽 나무에서는 이파리들이 병자처럼 한숨을 쉬고 있고
하얀 꿀벌이여, 너는 내 곁에 없지만
너의 목소리는 내 영혼 속에 깃들어 있나니
야위고 말이 없는 너는 다시 살아나리라
아, 말이 없는 나의 처녀여
9. 소나무에 취해
송진과 긴 입맞춤에 취해
나는 광란의 여름 바다 위로
장미의 돛단배를 띄운다
쇠잔해가는 하루의 종말을 향해
나는 창백하고 탐욕스런 바다를 가르며
황량한 대기의 가혹한 향기
속을 항해한다
아직도 쓰라린 과거의 음향과
버림받은 물거품의 슬픈 장식이 달린
회색의 의상을 걸치고
정열의 포로가 된 나는 하나뿐인 파도를 타고
달처럼 해처럼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가
갑자기 또 싱싱한 허리처럼 하얗고 쾌적해졌다가
행운의 섬과 섬 사이에서 잠이 든다
축축한 밤, 입맞춤의 나의 의상은
전류에라도 감전된 양 미친 듯 떨며
기세 좋게 꿈속을 파고들고
도취한 장미는 내 안에서 그 꽃잎을 편다
솟구치는 파도와 파도 한가운데에
평행으로 드러누운 너는 나의 팔에 몸을 맡기고
물고기처럼 한없이 나의 영혼에 달려든다
하늘 밑 에네르기에 싸여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10. 우리는 잃어버렸다
오늘도 우리는 황혼을 헛되이 보냈다
푸른 밤이 대지에 내리기 시작하는 초저녁에
우리가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저 멀리 언덕 위에서
서쪽으로 지는 낙일의 축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태양의 파편이
나의 두 손 사이에서 은화처럼 타오르고,
나는 떠올렸다 너를 고통스런 마음으로
너도 알고 있을 그때의 슬픔에 젖어
어디에 있었지 너는 그때?
누구와 함께
무슨 말을 주고받았지?
슬픔에 잠겨 멀리서 너를 느낄 때면
어쩌자고 사랑은 이다지도
갑자기 한꺼번에 밀어닥치는가?
황혼녘이면 항상 쥐고 있는 책은 내 손에서 떨어지고
상처 받은 개처럼 망토가 내 발에 감긴다
아, 날이 저물면 언제고 언제고 너는 멀어져간다
황혼이 입상을 지우며 사라져가는 쪽으로
11. 거의 하늘을 떠나
금방이라도 하늘 밖으로 나올 듯한 반달이
두 개의 산 사이에 닻을 내린다
선회하며 배회하는 밤, 눈의
보아다오, 얼마나 많은 별들이 웅덩이 속에서 부서지는가를
밤은 눈썹 사이에 죽음의 십자가를 만들고 달아난다
푸른 용광로 서로 싸우는 침묵의 밤
나의 심장은 정신 나간 바퀴처럼 회전하기 시작한다
먼 데서 온, 멀고 먼 데서 데리고 온 소녀여
하늘 아래서 너의 눈은 가끔 반짝반짝 빛난다
쉴 새 없이 내 가슴 위를 횡단한다
묘지에서 불어 닥친 바람이
너의 꿈을 뿌리째 뽑아 산지사방으로 흩어버린다
맞은편의 거대한 나무들도
송두리째 뿌리가 뽑혀 있었다
그러나 해맑은 소녀여 · 연기의 질문이여 · 밀이삭이여
너는 반짝이는 나뭇잎으로 바람을 만들고 있다
밤의 산 뒤에서 활활 타오르는 하얀 백합이여
만물이 너를 창조했나니 내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칼이 내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이 불안
지금은 그녀의 미소가
보이지 않는 다른 길을 가야 할 때다
종을 매장한 폭풍우 걷잡을 수 없는 태풍의 소용돌이
무엇 때문에 지금 내가 그녀를 붙잡고 슬픔에 떨게 하랴
아 모든 것으로부터 절연되어
고뇌도 죽음도 겨울도 없는 그 길을 가자
이슬 속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12. 네 가슴으로 충분하다
나의 마음은 너의 가슴으로 넉넉하고
너의 자유는 나의 날개로 충분하다
너의 혼 위에 잠들어 있는 나의 육체는
나의 입에서 하늘까지 오를 것이다
그날그날의 환상은 네 안에서 살고
너는 이슬처럼 꽃부리에 내린다
너는 너의 부재로 지평선을 판다
파도처럼 영원히 도망치면서
나는 말했다.
바람 속에서 너는
소나무 숲처럼 돛대처럼 노래하고 있었다고
소나무와 돛대처럼 키가 크고 말이 없는 너는
여행처럼 갑자기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그 옛날의 길처럼 다정다감한 여자여
네 마음속에는
메아리와 향수 어린 목소리가 깃들어 있나니
내가 눈을 뜨면 너의 혼속에서 잠든 새들이
보금자리를 바꾸려고 날개를 편다
13. 나는 표하는 데 열중했다
나는 불의 십자가로
네 육체의 하얀 지도 위에 낙인을 찍었다
은신처를 탐색하는 거미처럼 나의 입술은
공포와 갈증에 떨면서 네 안에서, 네 뒤에서 기어다녔다
슬프도록 감미로운 인형이여, 나는 네 슬픔을 달래기 위해
황혼의 바닷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네게 들려주었다
백조, 나무, 아득하고 즐거운 그 무엇,
포도의 계절, 무르익은 결실의 계절 등에 관한
나의 거처 항구에서 나는 너를 연모했다
꿈과 침묵을 넘나들었던 나의 고독은
바다와 슬픔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정박한 두 곤돌라의 선두 사이에서
의식을 잃고 입을 열지 못했다
입술과 목소리 사이에서 뭔가 죽어간다
그것은 새의 날개 같기도 하고 고뇌와 망각 같기도 하다
그물이 물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나의 인형이여, 한두 방울 남아 있는 물방울이 떨고 있다
그럼에도 그 무엇이 덧없는 이들 언어 사이에서 노래한다
그 무엇이 노래한다 갈증의 내 입까지 차오른 그 무엇이
오, 환희의 모든 언어로 너를 찬미할 수 있나니
광인의 손에 든 종루처럼 노래하고, 타오르고 달아나라
나의 슬픈 사랑이여, 갑자기 무슨 일이 너에게 일어났는가?
몹시도 추운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나의 가슴은 밤에 피는 꽃처럼 문을 잠근다
14. 매일 너는 논다
날마다 너는 우주의 빛과 놀고 있다
다정한 손님이여 너는 꽃 속으로도 오고 물속으로도 온다
너는 매일 내가 꽃송이처럼
두 손으로 감싸는 이 하얀 머리……
내가 너를 사랑한 이후 아무도 너를 닮은 사람은 없다
노란 화환 사이에 너를 길게 펼쳐다오
남쪽 하늘의 별 사이에 구름의 문자로
너의 이름을 쓰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로 하여금 상상케 해다오, 존재 이전의 네 모습을
갑자기 바람이 울부짖으며 닫혀진 나의 창을 두드린다
하늘은 검은 고기로 가득 찬 그물이다
모든 것을 풀어놓기라도 하려는 듯
바람이 사방팔방으로부터 불어온다
비가 옷을 벗는다
새들이 도망치듯 날아간다
바람 바람
인간의 폭력, 이것만이 내 싸움의 대상이다
폭풍이 검은 잎사귀들을 휘감고
지난 밤 하늘에 매놓았던 모든 선박 풀어놓았다
너는 여기 있다. 아 너는 달아나지 않는다
너는 내가 지르는 최후의 절규도 들어줄 것이다
불안에 떠는 사람처럼 내 곁에 있어다오
그러나 어떤 때는 불가사의한 그림자가 네 눈을 지나간다
지금도 지금도 여전히, 귀여운 처녀여,
너는 나에게 인동넝쿨을 가져다주고,
아직도 너의 유방에는 향기가 감돌고 있다
슬픈 바람이 나비들을 죽이며 질주하는 사이에
나는 너를 사랑하고 나의 환희는
자두빛 너의 입술을 깨문다
너는 어쩌면 나 때문에 상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외롭고 거친 나의 혼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나의 이름 때문에
우리는 자주 보고는 했다 샛별이 타오르며
우리들의 눈에 헤일 수 없이 입을 맞추고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황혼이 선회하며 부챗살을 펴는 것을
나의 언어가 너를 애무하면서 네 위에 비가 되어 내린다
햇살을 받은 진주조개와 같은
네 육체를 나는 오래 전부터 사랑했다
나는 네가 우주의 주인일 거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나는 네게 가져다줄 것이다 산에 핀 꽃과 코피유를
검은 개암나무와 키스로 가득 찬 바구니를
봄이 벚나무를 키우는 것처럼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우고 싶다
15. 나는 네가 조용하기를 바란다
잠자코 있을 때의 네가 나는 좋다
네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에
너는 듣고 있다 아주 먼 데서 그러나
나의 목소리는 네 귀에 닿지 않는다
네 눈은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만 같고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네 입술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 같다
삼라만상이 나의 혼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처럼
만물 가운데서 으뜸가는 너는 나의 혼으로 가득 차 있다
꿈의 나비여, 너는 나의 혼을 닮았구나
뿐만 아니고 너는 우수의 언어와도 같구나
잠자코 있을 때의 네가 나는 좋다 아주 멀리 네가 있는 것 같기에
너는 마치 탄식하고 있는 것 같다 뭔가 속삭이고 있는 나비여
너는 듣고 있다 아주 먼 데서 그러나 나의
목소리는 네 귀에 닿지 않는다
너의 침묵으로 나를 잠자코 있게 해다오
등불처럼 밝고 반지처럼 단순한 그 침묵으로
나 또한 너에게 말을 걸도록 해 다오
침묵 속에서 빛나는 별, 너는 흡사 밤이다
너의 침묵은
저 멀리서 빛나는 순박한 별의 침묵이다
잠자코 있을 때의 네가 나는 좋다
네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에
이미 죽어버린 사람처럼 너는 먼 데서 괴로워하고 있다
나는 그런 때, 말 한 마디, 미소 하나,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면 나는 기쁘다 나도 모르게 기쁘기만 하다
16. 해 질 녘 내 하늘에서
황혼의 내 하늘에서 너는 한 조각 구름
너는 내가 좋아하는 몸매와 색깔을 가지고 있다
너는 나의 것 너는 나의 것 달콤한 입술의 처녀여
너의 생명 속에 무한한 나의 꿈이 살고 있다
내 영혼의 등불이 너의 두 발을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쓰디쓴 나의 포도주는 네 입술에서 더욱 달콤해진다
오, 내 황혼의 노래를 거둬들이는 처녀여,
어쩌자고 나의 외로운 꿈은
너를 나의 것이라고 느끼고 있는가!
너는 나의 것 나의 것이라고
석양의 미풍을 향해 외치면서 나는 걷는다
그러면 바람이 와서 홍라비 같은
나의 목소리를 질질 끌고 가버린다
나의 눈 깊은 곳에서 사냥을 즐기는 소녀여, 너의 약탈은
물의 흐름을 막기라도 하듯 밤의 시선을 차단한다
사랑하는 소녀여, 너는 내 음악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고,
내 음악의 그물은 하늘처럼 넓다
나의 혼은 비탄으로 가득 찬 네 눈의 물가에서 태어났고,
그 비애의 눈동자 속에서 내 꿈의 영토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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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시 <가정>을 패러디한 것이다.
17. 생각하고 뒤엉키는 그림자들
생각에 잠겨 깊은 고독 속에서 그물로 그림자들을 잡아올린다
너 역시 먼 데, 아 누구보다도 더 먼 데 있다
생각에 잠겨 새들을 놓아주고, 오만가지 상념들을 지우고,
등불을 매장한다
안개 속의 종루여, 너는 저 멀리 높은 곳에 있구나!
압살당한 비애, 분쇄된 암울한 희망,
말수가 적은 방앗간 주인,
저 멀리 도시에서 밤이 고개를 숙이고 네게로 다가온다
내 앞에 나타난 이방인, 너는 그 어떤 사물처럼 낯설기만 하다
나는 길을 걸으며 골똘히 생각해본다, 네 앞에 놓인 나의 삶을
누구의 앞에도 서본 적이 없는 삶, 가혹한 나의 삶을
돌과 돌 사이에서 바다를 향해 울부짖는 나의 절규가
바다 안개 속으로 미친 듯 마구 질주한다
슬픈 분노, 절규, 바다의 고독
나는 미친 듯 격렬하게 하늘을 향해 팔을 내뻗는다
너, 여자여, 그 곳에서 너는 무엇이었지! 이 거대한 부채의
어떤 선, 어떤 살이었지? 너는 지금도 여전히 멀리 있다
숲속의 불이여! 타올라라 푸른 십자가로
타올라라, 타올라라, 빛의 나무들 속에서 활활 타올라라
타닥 타닥 소리내면서 무너지면서 불길이여 타올라라, 타올라라
그러면 불티에 화상을 입은 나의 혼은 춤을 추리라
누가 부르고 있을까? 침묵일까, 산울림 속에 깃든?
향수의 시간, 기끔의 시간, 고독의 시간,
그 모든 시간 속의 나의 시간이여!
바람이 노래하며 소라고동 속을 뚫고 지나간다
나의 육체에 맺힌 눈물의 정열이여
격렬하게 흔들리는 뿌리,
걷잡을 수 없는 파도의 습격!
나의 혼은 간단 없는 슬픔과 기쁨의
혼돈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생각에 잠겨, 나는 깊은 고독 속에 등불을 매장한다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18. 여기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여기서 너를 사랑한다
검은 소나무 숲을 헤집고 바람이 지나간다
달은 표류하는 수면에 그 빛을 발산한다
하루가 하루의 뒤를 추격한다
춤추는 무용가처럼 안개가 풀어진다
한 마리 은빛 갈매기가 낙일의 하늘을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때로는 배의 돛이 하늘의 별들이
어떤 때는 또 배의 검은 십자가가
홀로
나는 때때로 아침을 맞이한다
그럴 때면 나의 혼까지 축축하다
멀리서 바다가 운다
이곳은 항구
나는 여기서 너를 사랑한다
나는 여기서 너를 사랑한다
수평선이 너를 헛되이 숨기려고 한다
이 차가운 사물들 속에서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
가끔 나의 키스는 무거운 배를 타고
닿을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바다를 달린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낡은 닻처럼 잊혀진 존재라는 것을
황혼이 깃들 때 부두는 더욱 슬프다
쓰잘 데 없이 허기졌던 나의 삶은 이제 지쳤다
나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사랑한다 너는 너무 멀리 있다
권태가 뉘엿뉘엿 지는 황혼과 싸우느라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밤이 내려와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달은 꿈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가장 크낙한 별이 너의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내가 너를 사랑할 때처럼 바람 속의 소나무들이
철사처럼 가는 이파리들로 나의 이름을 노래하고 싶어한다
19. 나긋나긋한 황갈색 여자
갈색의 날렵한 소녀여 과일을 익게 하고
밀을 여물게 하고 해초를 꼬이게 하는 태양이
해맑은 너의 육체와 빛나는 너의 눈과
물의 미소를 머금은 내 입을 만들었다
네가 두 팔을 뻗칠 때면 검은 태양이
검은 머리끄덩이로 안타깝게 너를 휘감는다
개여울과 장난치듯 너는 태양과 장난을 친다
그러면 태양이 네 눈에 두 개의 검은 웅덩이를 남긴다
갈색의 날렵한 소녀여
나를 네게 접근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너와 나를 멀리 갈라놓는다 마치 정오의 태양처럼
너는 넋 잃은 나비의 청춘이고
파도의 도취이고 강력한 이삭의 힘이다
하지만 나의 우울한 마음은 너를 찾고,
나는 사랑한다
너의 해맑은 육체를 매끈하고 가냘픈 네 목소리를
밀밭과 태양처럼 양귀비꽃과 물처럼
아름답고 변치 않는 갈색의 소녀여
20.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오늘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써야지
이를테면 이렇게 써야지 '밤은 부서지고
저 멀리서 별들은 파랗게 떨고 있다'고
밤바람은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노래하고
오늘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써야지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가끔 나를 사랑했다
오늘 밤과 같은 밤에 나는 그녀를 가슴에 품고
가없는 하늘 아래서 수없이 그녀와 입을 맞추곤 했지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나 역시 그녀를 사랑했지
깊고 커다란 그녀의 눈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지
정말이지 나는 오늘 밤 가장 슬픈 시를 써야겠다
그녀는 내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를 잃었다고 느끼면서
거대한 밤에 귀를 대고 있노라면
그녀가 없는 이 밤은 더욱 거대하다
그리고 목장에 이슬이 내리듯 내 영혼에 시가 내린다
내 사랑이 그녀를 붙들지 못했대서 무슨 대수랴
밤은 부서지고 그녀는 내 곁에 없다
이게 전부다 먼 데서 누가 노래하고 있다 아주 먼 데서
그녀를 잃은 내 영원은 공허하다
그녀 곁으로 가기라도 하려는 듯
나의 눈길은 그녀를 찾고 있다
내 마음도 그녀를 찾고 그러나 그녀는 내 곁에 없다
그때와 똑같은 밤이
그때와 똑같은 나무를 하얗게 드러내는데
우리는 우리 두 사람은 그때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단연코 나는 지금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 그러나 나는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던가
나의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닿기 위해 바람 속을 헤매고 있다
딴 남자의 딴 남자의 것이 되어 있겠지
지난 날 나의 키스도
그 목소리도 해맑은 그 육체도 무한한 그 눈도
단연코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라
사랑은 이다지도 짧고 망각은 이다지도 긴 것인가
오늘 밤과 같은 밤에 나는 그녀를 가슴에 안고는 했다
그러나 그녀를 잃은 나의 영혼은 공허하다
그녀가 내게 남긴 이 아픔이 부디 마지막 아픔이 되기를
그녀에게 쓰고 있는 이 시가 부디 최후의 시가 되기를
절망의 노래
그대 그날 밤을 기억하는가,
그곳에 나와 함께 있던 그날 밤을?
강은 이미 고질이 된 탄식을 바다로 잇고 있었다.
새벽의 부두처럼 나는 버림받았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 오, 나는 버림받았다!
나의 마음 위로 싸늘한 화관(花冠)들이 떨어진다.
오, 쓰레기의 소굴, 난파된 자들의 잔인한 동굴!
전쟁과 비행(飛行)을 축적하는 그대
그대는 노래하는 새들의 날개를 펼쳐든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그대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바다처럼, 시간처럼,
그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파멸일 뿐!
공격과 입맞춤의 시간은 즐거운 것
그것은 등대처럼 타오르는 도취의 시간
파일럿의 열망도, 눈 먼 잠수부의 분노도,
사랑에 취한 자의 당혹도,
그 모두가 그대 앞에서는 파멸일 뿐!
안개의 유아기에서 떠도는 나의 날개달린,
상처받은 영혼,타락한 탐험가,
그 모두가 그대 앞에서는 파멸일 뿐!
그대는 고통과 결합하였고, 욕망과 결속하였다.
슬픔은 그대를 쓰러뜨렸으니
모든 것이 그대 앞에서는 파멸일 뿐!
나는 성벽의 그늘을 물러가게 했다.
욕망과 행동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걸어갔다.
사랑하다 잃어버린 여인, 오,
그대는 육욕, 나의 육욕의 대상이었고,
이 습기찬 시간에 나는 그대를 상기하며 노래부른다.
잔처럼 그대는 무한한 애정을 거두어들였고,
무한한 망각을 잔처럼 산산조각냈다.
그것은 섬의 검디검은 고독,
그곳에서 사랑의 여인은 팔을 벌려 나를 맞아주었다.
갈증과 굶주림은 있었지만 그대 자신이 과일이었다.
비탄과 폐허가 있었지만 그대 자신이 기적이었다.
아 여인이여, 그대의 영혼의 세계에서 그대의 품속에서
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건 나도 모르는 일!
그대에 대한 나의 욕망은 비록 짧았지만 가장 지독했던 것,
비록 취하게 했지만 가장 대담했던 것,
탐욕스러웠지만 가장 야무졌던 것
입맞춤이 난무하는 공동묘지,
그대의 무덤에는 아직도 열기가 남았고,
새들이 쪼아 먹은 포도송이는 여전히 타고 있었다.
오, 깨물린 입이여, 온 몸에 찍힌 입맞춤 자국이여,
오, 굶주린 이빨이여, 휘감긴 육체여.
오, 희망과 노력이 맺은 광란의 교접에서
우리는 결합했고 절망했다.
부드러움은 물과 가루처럼 가벼웠다.
말은 입술에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나의 운명, 그 속에서 나의 열망은 여행하였고
그 속에서 나의 열망은 쓰러졌으니
그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파멸일 뿐!
오, 쓰레기의 소굴, 그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쓰러지니
어떤 고통도 그대를 당하지 못했고
어떤 파도도 그대를 익사시키지 못했다.
끊임없이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대는 온몸을 불태웠고 노래불렀으며
언제나 뱃머리의 선원처럼 서 있었다.
아직도 그대는 노래의 꽃을 피우는가,
아직도 조류와 싸우는가.
오, 쓰레기의 소굴, 거침없이 괴로움을 퍼내는 우물.
창백한 눈먼 잠수부, 불운한 투석병(投石兵),
타락한 탐험가, 그 모두가 그대 앞에서는 파멸일 뿐!
떠나야 할 시간, 밤의 시간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냉혹한 시간이었다.
바다의 소란스런 허리띠는 해안을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싸늘한 별들이 솟아나면 검은 철새들은 먼 길을 떠났다.
새벽의 부두처럼 나는 버림받았다.
떨리는 그림자만이 나의 손아귀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아, 무엇보다 먼저 그 무엇보다 먼저
떠나야 할 시간, 오, 나는 버림받았다!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 1904-1973)는 칠레의 시인으로 마울레주 파랄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이에스 바소알토(Neftalí Ricardo Reyes Basoalto)이다.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나 교사로 있으면서, 시를 발표하여 문명을 떨쳤는데, 의식의 심연에 빛을 조명한 쉬르레알리즘 시인으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대학에서 철학 · 문학을 수학하였으며, 1927년부터 양곤 · 스리랑카 · 싱가포르 등지의 영사를 역임하고,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마드리드의 영사가 되어 R.알베르티 등의 전위시인과 교제하였다.
외교관으로 부임한 스페인에서 터진 내란의 비참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정치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이 있어 시작(詩作)에 착수, 근대주의적인 <황혼의 노래(Crepusculario)>로 문단에 데뷔하고, 1924년에 발표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絶望)의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ón desesperada)>에서 그의 독자적인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그 후의 작품 <무한한 인간의 시도(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열렬한 투석병>을 거쳐, 최고의 작품이라고 주목되는 <지상의 주소(Residencia en la tierra)>(1931)에 이르는 과정에서 카오스적인 요설(饒舌)로 존재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스페인내란 이후의 상황 속에서 점차 정치적 자세를 첨예화시키게 되었다.
그러한 예는 <제3의 주소(Tercera residencia)>(1945)에서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1944년에는 공산당에 입당하여 정치활동에 몰두했으나, 후에 다시 일상적인 친밀한 세계를 노래하게 되었다.
이 밖의 작품으로는 <커다란 노래(Canto general)>(1950), <기본적인 오드(Odas elementales)>(1954~1957) 등이 있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두산백과 참조)
Asian Morning / Koen de Wo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