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어(詩語)/ㄴ

나그네

높은바위 2023. 5. 3. 06:55

 

제 고장을 떠나서 객지를 떠다니는 사람. 고독한 사람, 단독자로서 인생의 근원적 모습을 형상한 말.

 

江(강) 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남도) 三百里(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상아탑", 1946년 5월)

 

죽음아,

내 너한테 가마

세상을 걷다가 떨어진 신발

이젠 아주 벗어던지고

맨발로 맨발로

너한테 가마. (김형영, '나그네 · 2', "다른 하늘이 열릴 때", p. 18)

 

만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문 밖에서 서성이고 있다면

이미 나그네가 아니다.

덧없는 짝사랑의 소유자일 뿐

정처 없이 떠나는 바람이 아니다.

나그네는 어둠에 기대지 않으며

사랑의 쓸쓸함에 물들지 않는다.

길은 언제나 열려 있고

사랑은 예고 없이 문을 닫는다 (김영재, '나그네', "절망하지 않기 위해 자살한 사내를 생각한다", p. 65)

 

나그네는 술잔에 산을 담아 들고

 

길을 떠난다

길이란 길들은 모두 녹아버려서

아무도 나그네에게 길을 가르쳐줄 수가 없다

그러나 길은 어디에나 있다 (돈연, '백가의 이야기 · 11', "벽암록", p. 36)

 

네가 떠난 자리

마른 들풀만 남고

초겨울 햇빛이 잠시 머문다

 

나는 그 자리에

추운 등을 누인다

 

나무를 건드렸다

후드득 날아가는 새

 

너의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이니

발 디딜 곳 없는

까마득한 곳에서 (채호기, '겨울 나그네', "슬픈 게이", p.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