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144. 나비의 여행

높은바위 2005. 7. 29. 08:08
 

144. 나비의 여행

 

                                       정 한 모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 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해후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왓느냐.

 

                      사상계. 1965.11.           

 

* 이 시는 아가의 순수한 꿈과 전쟁의 무서운 공포를 대조시켜서, 참담한 현실을 부정하고 순수에 의한 인간성의 회복을 노래한 휴머니즘 계열의 작품이다. 아가의 여행 모습을 ‘출발-시련-귀향’의 서사적 구조로 표현한 작품이기도 하다.

 

  제1연에서의 아가의 여행은 꿈길로의 여행이다. 그 여행은 아주 부드럽고 감미로운 모습으로 시작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떠나 잠의 강을 건너고 과거의 들판과 미래의 바다 위를 자유로이 떠돌아 보는 여행이다. 그러나 이 여행은 ‘깜깜한 절벽’과 ‘미로’라는 무서운 충격에 의해 좌절된다.

  제2연에서 무서운 장애물의 실체가 밝혀진다. 그것은 ‘아비규환하는 화약 냄새 소용돌이’로 보아 전쟁이다. 파괴와 죽음으로 얼룩진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에 부딪히면서 아가의 꿈길은 공포로 바뀌게 된다.

  제3연은 꿈길에서 좌절하여 돌아온 아가를 보며 안스러워하는 시적 자아의 독백이다. 천진한 꿈과 소망이 공포의 체험 앞에 떨 수밖에 없는 시대를 탄식하고 슬퍼하는 안타까운 심경이 표현되어 있다.

 

  시인은 이러한 ‘아가의 여행’을 통해 아가가 겪는 꿈 속에서의 화려한 기억, 현실에서 겪는 시련, 그리고 마침내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돌아오는 현실을 탄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전쟁의 공포가 없는 순수한 삶에의 기원을 주제화한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