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125. 木馬와 淑女

높은바위 2005. 7. 25. 08:47
 

125. 木馬와 淑女

 

                    박 인 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고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남길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여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내 귓전에 철렁이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1955.  ꡔ박인환선시집ꡕ

 

* 이 시는 6․25 직후의 지식인이 겪는 상실감과 허무감을 짙게 깔고 있는 작품이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퇴색된 데 대한 절망감과 애상감이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박인환은 정적인 기질을 가진 시인으로 비애, 절망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치중했고 흔히 센티멘탈리즘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 작품 역시 그의 이러한 기질과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기의 허무주의 분위기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강박 관념에 시달리다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영국의 여류 소설가)와 같은 비극적인 인물을 비롯하여 ‘목마’, ‘보이지 않는 별’, ‘늙어 버리는 소녀’ ‘불빛이 보이지 않는 등대’, ‘술병’, ‘상심’, ‘작별’ 등의 시어를 구사함으로써 작품 전체가 ‘퇴색하고 부서지며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비탄’이라는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구절은 이러한 절망감에서 오는 독백이다. 이는 인셍이 실제로 외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들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세상에서 외로움을 느끼면서 무엇을 어디에 호소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역설이다. 이러한 흐름을 거쳐 시는 마침내 ‘내 쓰러진 술병’을 끝을 맺게 되는데, 이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그의 비판적 태도가 집약적으로 나타난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