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이
나는 아이가 필요 없었네
그러나 아이 스스로 왔네
나의 후손 안 갖기의 간판은 이제 내걸 수가 없게 되었네
나무에 꽃이 피고, 꽃이 지면 우연히 열매가 맺듯, 그 열매는 너고, 그 나무는 바로 나
나무가 본디 열매 맺을 생각이 없었듯이,
나 역시 너에게 베푼 건 아니다
그러나 너는 이미 태어났다
그러니 나는 너를 먹이고 가르치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사람의 도리로서의 의무일 뿐
너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아니다
훗날 네가 다 커서, 내가 어떻게 아이를 가르쳤는가를, 잊지 말라
나는 네가 당당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 나의 효자가 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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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역사적 인물을 속속들이 알기 어렵다.
아는 것은 그저 단편적이거나 공적 모습인 경우가 많다.
중국의 사상가, 교육자이자 백화(白話) 운동의 기수였던 후스(胡適)의 삶을 살펴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시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나타나는 불합리성과 효의 허구성을 개인주의적 시각에서 시니컬하게 묘사한 것으로 이에 대한 당시 중국사회에서의 반응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시로 후스는 혹자로부터 ‘자식이 부모의 효자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염려가 있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후스의 효에 대한 입장은 그의 개인주의의 논리선상에서 보면 일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보아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다.
이 시는 아마 그의 사랑 없는 ‘특이한’ 결혼생활과도 관련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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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스(중국어 간체자: 胡适, 정체자: 胡適, 한자음: 호적, 1891년 12월 17일 ~ 1962년 2월 24일)는 중화민국의 외교관, 작가, 문학 연구자이자 반공주의 정치인이다.
후스는 구어문을 바탕으로 문학을 전개해야 한다는 백화운동의 주창자이다.
5·4 운동과 중국의 신문화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베이징 대학의 총장으로 재직했다.
1891년 12월 17일 중국 안후이(安徽) 성에서 태어나 1962년 2월 24일 대만에서 숨질 때까지 후스는 중국의 개화와 사회개량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14년 미국 코넬대를 졸업하고 콜럼비아대에서 존 듀이에게 교육학을 배워 프래그머티즘을 몸에 익혔다.
1917년 1월 ‘문학개량 추의(芻議)’를 잡지 ‘신청년’에 발표, 백화문 사용 등을 통한 문학혁명을 선도했다. 이론으로는 후스, 작품으로는 루쉰(魯迅)이 문학혁명을 이끌었다. ‘추의’는 자기 의견을 보잘것없다고 낮추는 말이다.
이어 베이징(北京) 대 교수로 문학이론 등 광범한 분야를 연구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5·4 문화혁명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젊어서 경도됐던 마르크스 노선과 결별한 뒤 주미 대사, 베이징대 총장을 역임한 그는 1948년 중공 정부 수립 직전에 미국에 망명했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중앙연구원 원장 등 요직을 맡았다.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자였던 그의 저서로는 ‘중국 철학사 대강’ ‘백화문학사’ 등이 있다.
하지만 그는 고독했다. 젊어서 과부가 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늘 병약했다. 14세 때 일자무식인 고향 처녀와 홀어머니의 뜻에 따라 약혼하고 13년 뒤 결혼했다. 후스는 유학시절에 안 6세 연상의 백인 여성과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밀회를 했다. 또 한 여인은 셋째 형수의 여동생. 후스의 아이를 낙태시키기도 했던 그녀는 나중에 중국 최초의 여자 농학교수가 됐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결혼생활을 45년간 지속하면서 두 여인과 애타는 사랑을 해온 게 후스의 또 다른 면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