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영국

헨리 앨퍼드(Henry Alford)

높은바위 2023. 8. 5. 04:08

 

그대와 나

 

내 손은 그대가 붙잡아주길 기다리느라 쓸쓸합니다. 임이여.

내 귀는 당신의 부름을 기다리느라 지쳤죠.

날 도와줄 당신의 힘, 쾌활함을 불러일으킬 당신의 웃음을 찾습니다.

마음과 영혼과 감각들이 하나같이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당신의 완전하고 솔직한 공감이 없는 난 의기소침해집니다.

우리는 함께여야 합니다 - 그대와 나;

우리는 서로를 원합니다. 하여 꿈과 희망,

계획하고, 보고, 세심히 완성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동반자, 위로자, 그리고 안내자며 친구로서,

사랑이 사랑을 구하는 만큼, 마음속의 생각은 생각을 구합니다.

인생은 너무 짧고, 혼자인 시간은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우리는 함께여야 합니다 - 그대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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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nd I

 

My hand is lonely for your clasping, dear;

My ear is tired waiting for your call.

I want your strength to help, your laugh to cheer;

Heart, soul and senses need you, one and all.

I droop without your full, frank sympathy;

We ought to be together―you and I;

We want each other so, to comprehend

The dream, the hope, things planned, or seen, or wrought.

Companion, comforter and guide and friend,

As much as love asks love, does thought ask thought.

Life is so short, so fast the lone hours fly,

We ought to be together, you and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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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앨퍼드(Henry Alford, 1810년 10월 7일 ~ 1871년 1월 12일)는 영국의 교회인, 신학자, 비평가, 학자, 시인, 찬송가, 작가이다.

 

앨포드는 영국 성공회에 5대째 성직자를 내준 서머셋 가문 출신으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날 때 죽었고, 윌트셔의 스탈레 애쉬튼의 큐레이터였던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그는 조숙한 소년이었고, 열 살이 되기 전에 몇 개의 짧은 설교를 썼으며, 유대인들의 역사와 일련의 동성애적 개요를 썼다. 

반복적인 학교 과정을 마친 후, 그는 1827년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학자로 진학했다. 

1832년에 그는 34번째 랭글러이자 8번째 클래식 연주자였고, 1834년 트리니티의 동료가 되었다.

 

그는 1841–184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헐세안 강사였고, 꾸준히 학자 및 설교자로서의 명성을 쌓았는데, 만약 그가 마이너 시와 잡지 편집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더 큰 명성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제인스 놀스에 의해 1869년에 설립된 형이상학회의 일원이었다.

1853년 9월 알포드는 런던 메릴본의 퀘벡 스트리트 채플로 이사하여 1857년 3월, 캔터베리 학장이 되었고, 그의 사촌인 Fanny Alford와 결혼했다.

그의 조기 결혼으로 그는 4명의 자녀만 낳았고, 그중 2명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그는 전과 마찬가지로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살았다. 

그는 대부분의 저명한 동시대인들의 친구였고, 상냥한 성격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가 직접 고른 무덤에는 디버소리움 비아토리스 히에로졸리맘 프로피시센티스(Diversorium Viatoris Hiierosolymam Proficiscentis)가 새겨져 있다.

 

<출판된 작품>

앨퍼드는 그의 그림책인 "The Riviera" (1870)가 보여주듯이 재능 있는 예술가였고, 그는 풍부한 음악적, 기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존 도네의 작품을 편집하는 것 외에도, 그는 자신의 소절인 <The School of the Heart>(1835), <무셀나예>(1841), <The Abbot of the Mutelnaye>(1841), <그리스 성서>를 여러 권 출판했다. 

사복음서(1849년)와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찬송가로는 '앞으로! 우리의 시계가 되어라', '오너라, 감사하는 사람들, 오너라', '만 곱하기 만' 등이 있다. 

그는 오디세이(Odyssey)를 번역하고, 잘 알려진 사자성어(여왕의 영어에 대한 탄원:A Request for the Queen's English)(1863년)를 썼으며, 컨템포러리 리뷰(1866–1870년)의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그의 주된 명성은 1841년부터 1861년까지 그를 점령한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경 기념비판(8권)에 있다.

성격상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언어학적으로 옛 동음이의어 해설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나타냈다. 

앨퍼드는 이어서 영어 독자들을 위한 신약성서를 출간했다(4권, 리빙턴스, 1868년). 

그의 미망인이 쓴 <His Life>는 1873년(라이빙턴스)에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