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그외 나라

포르투갈: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높은바위 2023. 2. 24. 07:31

 

    빨래하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이 욕조의 돌에다

잘도 옷을 두드리는구나.

그녀는 노래하느라 노래하며 슬퍼하네

존재하느라 노래하느라,

그래서 그녀는 기쁘기도 하네.

 

그녀가 옷을 다루듯

나도 언젠가 저렇게

시를 지을 수 있다면

아마도 내게 주어진

온갖 길들을 잃어버리겠지.

 

하나의 엄청난 전체가 있다

생각도 이성도 없이

하는 둥 마는 둥 노래하며

현실 속에 빨래를 두들기는 것……

하지만 내 마음은 누가 씻어줄까?

                                - 1933. 9. 15

 

 * * * * * * * * * * * * * *  

 

여인이 빨래를 하면서 돌에 옷을 두드린다.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빨래를 두드린다.

노래하고 있지만 왠지 슬퍼보이기도 한다.

슬프지만 고되게 빨래하는 일에 힘을 주는 노래이다.

 

그녀는 빨래를 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고된 삶을 살고 있다.

존재하는 것이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노래한다. 슬픈 노래일지라도.

그래서 그녀는 기쁘기도 하다.

산다는 것이.

 

그녀가 옷을 다루는 솜씨는, 빨래하는 솜씨는 프로페셔널하다.

그녀의 노래는 슬프지만 그녀는 존재하고 동시에 기뻐한다.

빨래에는 삶의 희노애락이 들어 있다.

 

시인도 언젠가 저렇게 시를 지을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내게 주어진 온갖 길들을 잃어버리겠지, 하고 생각한다.

(시인은 빨래와 같은 일상적인 삶, 하나만을 살지 못하고, 여러 다양한 삶의 이면을 갖고 살아가고 있기에.)

 

빨래는 하나의 엄청난 전체이다.

― 삶의 통일성, 총체성의 세계이다.

 

생각도 이성도 없이

하는 둥 마는 둥 노래하며

현실 속에 빨래를 두들기는 것……

 

빨래는 결코 철학이나 기타 관념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저 노래하며 익숙하게 하던 일을 할 뿐이다.

하는 둥 마는 둥 해도 완벽하다.

 

그것은 여인이 현실에서 거의 매일 하는 일일뿐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영혼을 씻는 일처럼 느껴진다.

거기엔 삶의 진실, 세계의 통일성이 있다.

 

시인은 생각한다.

빨래와 같은 일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내 마음은 누가 씻어줄까?

 

영혼을 깨끗하게 빨아서 신 앞에 널어놓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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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1888년 6월 13일 ~ 1935년 11월 30일) 포르투갈의 모더니즘을 이끈 대표 시인이다.

해럴드 블룸은 서양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26인 가운데 셰익스피어, 괴테, 조이스, 네루다와 더불어 페르난두 페소아를 꼽는다.

일생 동안 70개를 웃도는 이명(異名) 및 문학적 인물들을 창조하고 독창적인 글을 썼다.

포르투갈어와 영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 및 서로 다른 문체를 구사하였으며, 시, 소설, 희곡, 평론, 산문 등 많은 글을 남겼다.

 

1888년 리스본에서 태어난 페소아는 일찍 친아버지를 잃고, 외교관인 새아버지와 함께 가족 모두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했다.

1905년에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리스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학업을 중단하였다.

일생을 마칠 때까지 '무역 회사의 해외 통신원'으로 무역 서신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평생 여러 잡지와 신문을 통해 130여 편의 산문과 300여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생전에 출간한 포르투갈어 저서는 시집 『메시지』(1934)가 유일하다.

1915년 포르투갈 모더니즘 문학의 시초인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했다.

오랫동안 틈틈이 적은 단상을 모아 『불안의 책』을 출간하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1935년 47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엄청난 양의 글이 담긴 트렁크가 발견되었고, 현재까지도 분류와 출판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