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이탈리아

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

높은바위 2023. 3. 17.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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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나는 이제 외롭지 않다. 최근의 여자가

바닥에 누워 있고, 아직 밤의 잠에 젖어, 차갑고

혼탁하고 고요한 강물 위로 힘겹게 나아가는

내 보트의 이물을 무겁게 누르고 있다.

햇살 아래 재빠른 물살과 모래 채취꾼들의

소음으로 격렬한 포 강을 벗어나, 수많은

소용돌이 물굽이를 돌고 돌아 산고네 강으로

들어갔다. "꿈만 같아." 그녀가 누운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높다란 강둑의

좁은 꼭대기에는 포플러나무들이 빽빽하다.

 

이토록 고요한 강물에서 보트는 얼마나 볼품없는가.

이물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나는 고물에 서서

힘겹게 나아가는 보트를 본다. 하얀 시트에

둘러싸인 여자의 몸무게에 이물이 가라앉는다.

여자친구는 게으르다고 말했고,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누워 혼자 나무들 꼭대기를 응시하고 있고,

마치 침대에 있는 듯, 보트는 무겁다.

이제 한 손을 강물에 담그고 물결을 일으키며,

강물까지 무겁게 만든다. 나는 그녀를 볼 수 없다.

자기 몸을 누인 뱃머리에서 고개를 돌리고

등을 움직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지켜본다.

내가 이리로, 가운데로 오라고 말하자

어색한 미소로 대답했다, "가까이 있고 싶어?"

 

예전에 나는 목욕 후에 나무들과 돌들 사이에서

취할 때까지 태양을 계속 응시하곤 했고,

이 모퉁이에서 땅에 올라와 물과 햇살에

눈이 멀어 막대기를 내던지고 벌렁 뒤로 누워,

나무들의 호흡과 풀들의 포옹에 땀과

가쁜 숨결을 가라앉히곤 했지. 지금 그늘은

지친 팔다리와 핏속을 짓누르는 땀에 따스해지고,

나무들의 둥근 천장에서 침실처럼 빛살이

스며든다 풀밭에 앉아 나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무릎을 껴안는다. 여자친구는 포플러나무 숲 속으로

웃으면서 사라졌고, 나는 뒤쫓아가야 한다.

드러난 내 피부는 햇볕에 검게 그을렸다.

금발의 여자친구는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자갈밭 위로 뛰었고, 연약한 손가락과 함께

감춰진 육체의 향기를 느끼게 했다.

예전 그때는 보트 위에서 말라버린 물기와

햇살 속의 땀냄새가 향기였는데

여자친구는 조급하게 나를 부른다. 하얀 옷가지

나무들 사이로 돌고, 나는 뒤쫓아가야 한다.

 

 * * * * * * * * * * * * * *  

 

* 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 1908년 ~ 1950년)는 이탈리아의 소설가 · 시인이다.

1908년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주의 작은 마을 산토 스테파노 벨보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누이 손에서 자랐으며 토리노로 이주해 학업을 마쳤다.

디첼리오 고등학교 때 작가이자 반파시즘 활동가인 교사 아우구스토 몬티에게서 큰 영향을 받고, 영문학을 공부하던 토리노 대학 때는 레오네 진즈부르그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과 사귀며 문학적 야망을 키운다.

1932년 허먼 벨빌의 <모비 딕>을 번역 출간한다.

파시즘에 맞서고 당대 문학을 갈아엎는 방편이었던 파베세의 미국문학을 향한 열정은, 엘리오 비토리니와 함께 이탈리아 신사실주의 문학을 여는 계기가 된다.

1935년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인을 지키려다 공산당 협력자로 몰려 파시즘 정권으로부터 감금 3년형을 받고 남쪽 바닷가 브란칼레오네 마을로 유배된다.

그 무렵 소용돌이치는 속내를 하루하루 끼적이기 시작하고, 이는 확고한 습관으로 굳어진다.

1936년 사면되어 토리노로 돌아와 처녀시집 <피곤한 노동>을 펴내고 줄리오 에이나우디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며 여러 소설을 구상한다.

2차 대전 발발로 파시스트군에 징집되지만 천식으로 면제, 반년가량 로마의 병원에 머문다.

1943년 에이나우디에서 <피곤한 노동> 최종판을 내면서, 시인의 한 시절이 끝났음을 선언한다.

이후 소설에 매진한다.

왕성한 창작열로 <동지> <닭이 울기 전에> <언덕 위의 집>  등을 발표하고, 독특한 형식의 <레우코와의 대화> 같은 작품을 내놓는가 하면, 1949년작 <아름다운 여름>으로 1950년 최고 권위의 스트레가 문학상을 받는다.

그러나 유명 작가로 발돋움한 그해 여름, 마흔둘의 나이로 돌연 세상을 등져 많은 이를 충격에 빠트렸다.

봄에 출간된 <달과 화톳불>은 그의 마지막 소설이었고, 사후에 시집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와 유배 시절부터 썼던 방대한 양의 일기를 한데 엮어 산문집 <삶이라는 직업>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