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나귀가 좋아
물푸레나무 긴 울타리를 끼고 걸어가는
순한 당나귀가 나는 좋다.
당나귀는 꿀벌에 마음이 끌려
두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태워주기도 하고
호밀이 가득 든 부대를 나르기도 한다.
당나귀는 우물가에 가까이 이르면
버거정거리며 주춤걸음으로 걸어간다.
내 사랑은 당나귀를 바보로 안다.
어쨌든 당나귀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당나귀는 언제나 생각에 젖어 있고
그 두 눈은 보드라운 비로드 빛이다.
마음씨 보드라운 나의 소녀야.
너는 당나귀만큼 보드랍지 못하다.
당나귀는 하느님 앞에 있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 닮아서 당나귀는 보드랍다.
당나귀는 피곤하여 가벼운 모양으로
외양간에 남아서 쉬고 있다.
그 가련한 작은 발은
피곤에 지쳐 있다.
당나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가 할 일을 모두 다했다.
그런데, 내 소녀야, 너는 뭘 했지?
그렇군, 너는 참 바느질을 했지.
하지만 당나귀는 다쳤단다.
파리란 놈한테 찔렸단다.
측은한 생각이 들 만큼
당나귀는 너무나 일을 많이 한다.
내 소녀야, 너는 무얼 먹었지?
너는 앵두를 먹었지?
당나귀는 호밀조차 먹지 못했다.
주인이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이다.
당나귀는 고삐를 빨아 먹다가
그늘에 가 누워 잠이 들었다.
네 마음의 고삐에는
그만한 보드라움이 없단다.
그는 물푸레나무 울타리를 끼고 가는
아주 순한 당나귀란다.
내 마음은 괴롭다.
이런 말을 너는 좋아할 테지.
그러니 말해다오, 사랑하는 소녀야,
나는 울고 있는 걸까, 웃고 있는 걸까?
가서 늙은 당나귀보고
이렇게 전해다오, 나의 마음을.
내 마음도 당나귀와 마찬가지로
아침이면 산작로를 걸어간다고.
당나귀한테 물어라, 나의 소녀야.
내가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를
당나귀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당나귀는 어두운 그늘 속을
착한 마음 한아름 가득 안고서
꽃핀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 친구인 앙드레 지드와의 북 아프리카 여행과 서너 차례의 파리 나들이를 제외하고는 잠(Francis Jammes : 1868-1938)은 자기가 태어난 마을에서 떠난 일이 없었다.
그는 오트 피레네의 투르네에서 출생하여 그 옆 마을인 바스 피레네의 아스파렝에서 작고하였다.
토지 공증인 사무소에서 견습으로 일하고 있을 때 최초의 시집을 파리의 친구들, 그가 존경하던 말라르메와 지이드에게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과 평생의 우정을 맺게 되었다.
<새벽의 안젤류스에서 저녁의 안젤류스까지>(1989) <벚나무 조상(吊喪)의 슬픔>(1902)등의 시집 외에 <산토끼 이야기>(1903)등의 산문 작품을 발표하였다.
1906년 경을 경계로 하여 그의 작업은 종교적인 색채를 짙게 띠게 되었다.
<하늘속의 빈터>(1906) <기독교적 농경시(農耕詩)>(1912)등에는 열렬한 카톨릭시인 클로렐에 의한 영향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시든지 산문이든지 간에 잠의 초기 작품에는 태어난 고향의 흙냄새와 먼 타향에 대한 꿈이 기묘하게 감미로운 우수를 지니고 혼합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자연인 것이며, 그것을 그대로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시인의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후년에 그가 "시로써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 태도에는 항상 세상과 화해하고 있는 소박스러운 경건함이 있었다.
빛깔과 냄새가 깨끗한 이런 시작 태도에 의하여 잠은 상징주의 말기의 프랑스 시세계에 새로운 숨을 불어 넣었다.
프랑시스 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진실이란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이며, 시가 깨끗하기 위해서는 시 속에서 진실을 노래해야만 한다.
또한 유파는 오직 그 하나밖에 없는 것이며, 그것은 가능한한 정확하게 아름다운 글자를 배우려 하는 어린 아이와 같이 아름다운 새나 꽃이나 매력적인 다리와 보기 좋은 가슴을 지닌 소녀 등을 시인들이 의식적으로 묘사하는 유파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