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원진(元稹)

높은바위 2015. 7. 27. 10:49

 

                       직부사(織婦詞)  베 짜는 아낙의 노래

 

織婦何太忙(직부하태망)                               베 짜는 아낙네 어찌 그리 바쁜가?

蠶經三臥行欲老(잠경삼와행욕노)                  누에는 세 번 잠을 자고 곧 늙으려 한다.

蠶神女聖早成絲(잠신여성조성사)                  누에의 성녀(聖女)는 일찍이 명주실을 만들었지만,

今年絲稅抽征早(금년사세추정조)                  금년 명주실 세금은 일찍이도 거두는구나!

 

早征非是官人惡(조정비시관인악)                  일찍 세금 거두는 일은 관리들의 잘못이 아니니,

去歲官家事戎索(거세관가사융색)                  작년에 나라에서 전쟁을 치렀기 때문.

征人戰苦束刀瘡(정인전고속도창)                  징병나간 군인들은 자상(刺傷)으로 고생이 심한데,

主將勳高換羅幕(주장훈고환라막)                  공훈 높은 장군은 비단 장막으로 바꾸었다.

 

繰絲織帛猶努力(조사직백유노력)                  실 켜서 비단 짜는 일에 힘쓰는 것은 여전하지만,

變緝撩機苦難織(변집료기고난직)                  물레를 고치고 베틀을 만지다보니 짜기 어렵다.

東家頭白雙女兒(동가두백쌍여아)                  동쪽의 이웃집 백발이 성성한 두 여인,

爲解挑紋嫁不得(위해도문가부득)                  꿩깃 무늬 깨치다가 시집도 못 갔다.

 

簷前嫋嫋遊絲上(첨전뇨뇨유사상)                  치마 끝에 휘청휘청 휘늘어진 실을 보니,

上有蜘蛛巧來往(상유지주교래왕)                  그 위에서 거미는 교묘하게 오간다.

羨他蟲豸解緣天(선타충시해연천)                  부럽구나, 저 벌레 하늘을 꾸밀 줄 알아,

能向虛空織羅網(능향처공직라망)                  허공에다 비단 그물을 짤 수 있으니!

 

 

 

* 원진(元稹 : 779-831)은 자가 미지(微之)이며, 하남성(河南省) 사람이다.

어려서 집안이 가난하여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하였으며, 일찍이 관직에 나가 15세의 나이로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직간을 잘하여 환관과 수구적인 관료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갔다가, 나중에 구세력과 타협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郞), 동평장사(同平章事) 등의 벼슬을 지냈다.

한때 군신과의 갈등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831년 무창군절도사(武昌軍節度使)로 재임하던 중 병사했다.

 

백거이(白居易)와 함께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주도했다.

백거이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시가 일찍 알려져, 원재자(元才子) 또는 원·백(元白)으로 불렸으나, 문학적 재능이 백거이를 능가하지 못했으며, 시가 평이하기는 하나 뜻이 잘 통하지 않는 구절도 더러 있다.

또 정치상의 변절 때문에 원진의 명성은 그리 높지 못했다.

 

백거이와 문학관을 같이 하여 두보(杜甫)를 추존하면서, 그들의 시론(詩論)은, 시란 평이한 표현이라야 한다는 것, 그래서 사실에 따라 제목을 달았으며, 시란 사회를 개선시키는 도구라야 한다는 것으로, 현실에 존재한 사실을 솔직하게 전달하여 이 시대의 정당성과 광명성을 남겨야 함을 주장하였다.

사회시(社會詩)를 정립하기 위한 의식적인 주장이었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시를 고풍(古諷), 악풍(樂諷), 고체(古體), 신제악부(新題樂府), 율시(律詩), 염시(艶詩) 등 6가지로 나누고, 백거이가 신제악부에 치중한 반면, 원진은 고제악부에 치중하였다.

지금까지 719수의 시가 전해지며, 내용별로 보면 풍유시가 가장 많다.

그 중에서 60년이나 계속된 전쟁으로 고통을 받는 농가(農家)의 한을 쓴 <전가사(田家詞)>, 상인들의 불로소득을 풍자한 <고객악(估客樂)>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장편 서사시 <연창궁사(連昌宮詞)>는 궁인들의 대화형식을 이용하여 당나라 현종(玄宗)의 사치하고 황음무도함을 폭로하면서, 조정의 계획으로 노력해야지 병력을 동원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주장을 제기하였는데, 우의(寓意)가 뚜렷하고 구성이 잘 이루어져 있으며 묘사가 세밀하고도 치밀하며 풍격이 새로워,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와 우열을 다툰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저서에 <원씨장경집(元氏長慶集)>(60권)이 있고, 소설집으로 <앵앵전(鶯鶯傳)>이 있다.

 

이 시 <직부사(織婦詞)>는 세금에 시달려 혼기를 노친 노처녀들의 처지를 동정한 노래다.

그 세금은 전비를 대기 위한 것이었지만, 전쟁의 결과는 한 사람의 장군만 공훈을 세우고, 수많은 병사들은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줄곧 무늬를 새긴 비단만을 짜다가 혼기를 놓치고, 백발이 성성하게 늘어난 불쌍한 여인들이 가련하기만 하다.

 

고대 수공업자들은 그 기술을 가업으로 전수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업이었다.

자기 가문의 기술을 외부로 유출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딸들을 출가시키지 않은 것도 괘념치 않았다.

 

이 시는 원화12년(817)년에 지은 시로, <원부고제(樂府古題)>라는 제목의 19수 중 한 수다.

당나라 때 방직산업은 크게 번성했다.

형(荊), 양(揚), 선(宣), 익(益) 등의 주(州)에서는 모두 방직만을 위한 정부기구가 설치되어, 방직을 감찰하고 세금을 징수했다.

이 시의 배경은 강릉(江陵)으로, 베틀 짜는 부녀자들의 고통을 그렸다.

Vertlain - The last fl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