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왕유(王維)

높은바위 2015. 6. 14. 17:12

 

 

                        소년행(少年行)

 

                                                         1

 

新豊美酒斗十千(신풍미주두십천)                    신풍(新豊)의 좋은 술은 한 말에 만 닢.

咸陽遊俠多少年(함양유협다소년)                    함양(咸陽)의 협객들에는 젊은이도 많다.

相逢意氣爲君飮(상봉의기위군음)                    만나자 의기 상통하니 술을 마시리,

繫馬高樓垂柳邊(계마고루수류변)                    높은 다락 수양버들 가에 말을 매어놓고.

 

                                                         2

 

出身仕漢羽林郞(출신사한우림랑)                    벼슬 얻어 한(漢)나라 섬기니 우림랑(羽林郞),

初隨驃騎戰漁陽(초수표기전어양)                    처음으로 표기장군 따라 어양(漁陽)에서 싸운다.

孰知不向邊庭苦(숙지불향변정고)                    누가 알겠나, 국경으로 향하는 괴로움을!

縱死猶聞俠骨香(종사유문협골향)                    죽는다 해도 협객의 아름다운 이름은 들으리!

 

                                                         3

 

一身能擘兩彫弧(일신능벽양조호)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쇠뇌를 당긴다.

虜騎千重只似無(노기천중지사무)                    천 겹 오랑캐의 기병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

偏坐金鞍調白羽(편좌금안조백우)                    황금 안장에 깐깐하게 앉아 흰 궁깃을 고르어,

紛紛射殺五單于(분분사살오선우)                    펄렁펄렁 다섯 선우(單于)를 쏘아 죽인다.1)

 

                                                         4

 

漢家君臣歡宴終(한가군신환연종)                    나라의 군신들이 축하연을 마치고

高議雲臺論戰功(고의운대논전공)                    높다란 운대에서 전공을 논의하네.

天子臨軒賜侯印(천자림헌사후인)                    천자께서 임하시어 봉후의 직인을 내리시니

將軍佩出明光宮(장군패출명광궁)                    장군들은 상패를 차고 명광궁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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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섯 선우 : 흉노의 임금 다섯.

 

 

 

* 왕유는 중국 당(唐)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상서우승(尙書右丞)의 벼슬을 역임하여 왕우승(王右丞)이라고도 불린다.

 

사마(司馬) 벼슬을 하던 왕처렴(王處廉)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도였다.

때문에 왕유는 어려서부터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아우인 진(縉)과 함께 어려서부터 시(詩)와 서(書), 음곡(音曲) 등에 뛰어난 재주를 나타냈다.

 

9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5살에는 당(唐)의 수도였던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으로 유학을 가서 황실(皇室)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현종(玄宗, 재위 712∼756) 때인 721년(開元 9년)에 진사(進士)에 급제(及第)하여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한때 제주(濟州, 지금의 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다가 관직을 떠나기도 하였으나, 734년(開元 22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다시 중앙의 관직으로 복귀한 뒤 감찰어사(監察御史),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 등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최씨(崔氏)가 죽은 뒤 상(喪)을 치르기 위해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기도 했지만, 현종(玄宗) 말기에는 이부낭중(吏部郎中)과 급사중(給事中) 등의 요직(要職)을 역임하였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고, 756년 장안(長安)이 점령되자 왕유(王維)는 반란군에 사로잡혀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그는 벼슬을 받았지만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남전(藍田, 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중난산[終南山] 기슭에 세운 망천장(輞川莊)에 머물며 시(詩)로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다.

758년 현종(玄宗)의 뒤를 이은 숙종(肅宗, 재위 756~762)이 반란군을 물리치고 장안(長安)과 뤄양[洛陽]을 탈환한 뒤에 그는 안록산(安祿山)에게 벼슬을 받은 일로 문책을 받았지만 사정이 인정되어 사면(赦免)을 받았다.

그리고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등용된 뒤,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중서사인(中書舎人), 급사중(給事中)을 거쳐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었다.

 

이처럼 왕유(王維)는 당(唐)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번성했던 시기에 고위 관직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 음악가로서 다방면에 모두 이름을 떨쳤다.

 

이 소년행(少年行)—젊은이의 노래 4수 중 제1수는 의협심(義俠心)이 있는 서울 소년들의 호탕한 놀이의 일면을 읊었다.

모두 부잣집 아들들이라 술값이 싸고 비싼 것은 가릴 것 없다.

저리로 가자하면 그 사유를 따지지 않고 몰려가는 것이 소년기의 특징이라, 술 마실 수 있는 청년들이기에 좋은 술이 있는 신풍으로 말 타고 달려가 고루거각이 늘어선 길가의 수양버들에 말을 매어두고는 술집에 몰려 들어가 권커니 잣커니 술에 함빡 취하며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펴리라.

장차 나라를 짊어지고 가야 할 젊은이들이라, 이 정도의 호기(豪氣)는 어른들도 이해해 줄 것이다.

 

이 시는 7언절구(7言絶句)로서 압운은 千, 年, 邊 자로 평성 ‘선(先)’ 평운이다.

평측은 차례로 ‘平平仄仄仄仄平, 平平平仄平仄平, 平平仄仄平平仄, 仄仄平平平平平’으로 이사부동이륙대(二四不同二六對)에 맞는 곳은 셋째 구뿐이고 반법, 점법(反法, 粘法)이 안 되어 고시(古詩)로 볼 수도 있다.

Golden Coast - Dream And An MPC (Televisor Remix)